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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Jan 10. 2023

세계에 대한 자연원리적 이해

메타인문학 04


#인문 #역사 #메타인문학


세계에 대한 자연 원리적 이해


있는 그대로의 앎


우리는 지식과 정보가 넘치는 시대를 산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역사 이래 가장 축복받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균형 잡힌 합리적 앎을 통하여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축복의 기회를 충분히 누리고 있는 것일까?


최상의 앎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으로 말해진다. 인간의 모든 것은 이 간단한 명제에서 출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지식과 정보의 시대를 사는 기본 소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은 매우 쉬운 듯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오랜 숙제였다.


아득한 수렵 채집 시절부터, 앎은 삶의 승부처였다. 기회와 위험이 언제 어디에 있을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시작한 인류의 대이동도 '새로운 앎'을 위한 대장정이었다.


’ 있는 그대로를 안다는 것‘은 맹수가 득실거리고 기후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 속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던 인간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앎을 주관하는 인간의 두뇌는 모든 자원과 수단을 동원해 힘껏 진화해야 했고, 이웃의 도움을 얻기 위해 언어는 상황을 정확히 묘사하고 정교하고 풍부한 표현을 담도록 분화 발전되어야 했으며, 말과 음성은 명료하고도 알아듣기 쉽도록 발달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앎을 얻고 이웃과 나누기 위한 것이었다.


그림/ 있는 그대로를 보자. 이것이 바로 자연 원리적 진리라는 오랜 지혜이다. 남이 보는 대로 보지 말고,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아는 일이다. 이것이 과학이자 합리라는 의미다.


우리 삶은 이처럼 앎의 바탕 위에 있다. 우리의 앎은 쉬운 듯해도 살펴보면 의외로 만만치가 않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같은 사실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본 내용이 각기 다르고 의견 또한 각양각색임에 놀란다.
게다가 앎은 위기에는 생사를 건 기로가 될 수가 있고, 사업에는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 되며, 주식 투자에는 예술에 버금가는 타이밍이 된다. 그리고 사랑에는 운명의 순간으로 오는 것이다.

또 모든 종교의 기착지도 결국 '앎'이라는 사실도 깨닫는다. 그래서 두꺼운 경전을 읽고 외우기까지 한다. 불교에서는 궁극적 지혜인 반야를 ’ 있는 그대로를 보는 지혜'라고 말하며, 근대의 서구에서는 어렵다고 소문이 난 칸트의 '순수 이성'이며, 오늘날엔 세계적 거대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투자를 하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AI의 최종적 성과물인 ‘정보’이다.

이것 모두가 다름 아닌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냥 쉬울 것 같고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으며, 그래서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생각하기도 쉬운,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에 세상은 온통 목을 매고 있는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을 우리는 '진실'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대로의 이치나 원리를 우리는 '진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이룩한 오늘날의 앎은 놀랍기도 하다. 세상을 낳은 우주의 기원을 알아내고, 그 근원적 원리로 오늘날의 물질문명을 이루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 가늠할 수 있는 시공간에 도달해, 마침내 자신의 근원인 우주 자연과 마주 하고 있는 시대이다.
이 모두가 우주 자연의 근원적 원리인 ‘로고스 logos’의 항구적이고 정연한 작용이 가져온 결과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있는 그대로의 앎'이란 얼마나 자명하고 얼마나 원대하며 얼마나 근본적인 것인 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의 가장 앞에 위치한 인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도 가늠할 수가 있다.

존재와


개인으로 돌아와서도, 자신의 당면한 과제 또한 '있는 그대로의 앎'에 귀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희로애락의 번뇌와 애오욕의 갈등이 모두 있으며,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과 시행착오의 원인과 결과도 모두 여기에 귀결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이렇게 중대한 일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이러한 앎의 능력을 지니고 있을까?
자연 원리를 따라 우리가 앎에 이르는 과정을 스스로 관찰해 보면, 이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감성과 지성과 이성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논리적인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을 볼 수가 있다.

인터넷과 책에서 자료를 찾아보면 이에 대한 이해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우리의 사유와 생각의 세계는 앎을 위해 얼마나 정교하게 진화했고 특화되어 있는 지를 알고는 놀라게 된다.
'있는 그대로를 아는 것'이라는 이 간결한 정의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것'과 '아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 지와, 또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지의 두 측면이다. 앞서 말한 존재론과 인식론이다.
사실 이것은 초등학교 이후부터 금까지 공부해온 것인데, 그때는 시험 보기 위해서였고, 지금은 진짜 궁금해서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닌 교육 제도의 현실이다. 이 문제는 다음에 맡기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세계는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이 물음은 막연해 보이지만 의외로 간단할 수가 있다.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진리체계'로 볼 수가 있다. 손가락 안에 드는 몇 개의 큰 진리와 그것으로부터 나온 원리와 현상들이 세계를 이루고 있다. 우리의 삶은 진리와 필요한 원리를 알아내어 그것을 따르고 활용하는 과정인 셈이다. 즉 '진리체계'를 나의 '인식체계'로 쫓아가는 방식이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간단히 정의할 수도 있지 않는가?
우리의 앎은 이 두 세계를 가깝게 일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 두 세계가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삶은 풍부해지고 윤택해지며 편리해진다.

사실 이것은 과학 등 모든 학문 연구의 기본 구조다. 또 우리의 일반적 앎의 방식이기도 하다.  학문의 방법이란 우리 앎의 방식의 '엄밀한 연장 extension'에  불과함을 알 수가 있다.
우리의 생각과 일생을 두고 하는 노력도 내 밖의 '진리체계'와 내 안의 '인식체계'를 일치시켜 균형을 얻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밖의 세계와 내 안의 세계가 자연스럽게 맞아질 때 우리는 자유와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이 두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가능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빅 데이터를 구축하여 인공지능 AI을 활용하려 한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는 방대할 뿐만 아니라 빠르게 변하고 새롭게 발전한다.



오늘날을 지식과 정보의 시대라고 말하며 모두가 쫓아가지만, 그것을 제때 정확히 아는 것은 지식과 정보 만으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또 어렵게 얻은 지식과 정보의 많은 부분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얼마 안 가 진부해져 쓸모없게 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제대로 된 앎을 제 때에 얻을 수가 있을까?  여기엔  누구나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멋진 방법이 있다.


- 메타 인문학 1.0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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