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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Jan 13. 2023

오델로 신드롬의 재해석

메타인문학 05-1


오델로 신드롬의 재해석

오델로 신드롬 Ohello syndrome은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델로'에서 유래된 말이다.

때는 15세기 말엽, 오델로Othello는 피부색이 검은 무어인이라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베니스 공화국의 장군이 되어 키프로스 섬 총독 자리까지 오른 고상한 인품과 명성의 소유자였다.
베니스 공화국 원로원 의원 브라밴쇼의 딸 데스데모나는 오델로의 탁월한 언변과 인품에 반하여 만난지 얼마되지 않아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아버지 몰래 오델로와 비밀 결혼을 하여 아버지 곁을 떠나자, 아버지 브라밴쇼는 검둥이 무어인의 꾐에 빠졌다고 격노한다.
한편 오델로는 겉으로 충성을 다 하던 그의 마차 기수 이아고 대신에 잘생기고 유능한 장교인 카시오를 승진시켜 부관으로 삼는다. 이아고는 이에 대한 분노과 질투로 끓어 오르게 된다. 그는 데스데모나를 짝사랑 하고 있던 베니스 귀족 로더리고를 부추겨 음모를 꾸미게 되는데.

이아고는 오델로에게 데스데모나가 그의 부관 카시오와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고 의심하게 만든다. 오델로는 이아고의 간계에 넘어가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의심은 커져 갔고, 질투에 눈이 먼 오델로는 결국 아내를 목 졸라 살해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진실이 이아고의 아내이며 데스데모나의 시녀인 에밀리아에 의해 밝혀지고, 오델로는 아내의 결백을 알게 된다. 자책감에 싸인 오델로는 자살함으로써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눈먼 질투심이 빚은 비극인 오델로의 줄거리이다.

오델로 신드롬과 질투라는 감정
지성과 용기와 고상한 인품을 가진 오델로가 질투에 눈이 멀었던 이유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질투와 그 안에 타오르는 증오의 감정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세익스피어는 오델로Othello을 통하여 질투의 근원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며, 그 진정한 답을 우리의 몫으로 남겨 놓는다.



편견의 시작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오델오의 검은 피부색이다. 오델로는 백인 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성공한 북아프리카 이슬람계 혈통을 지닌 무어인이다. 그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며 탁월한 능력으로 장군이 되지만 내면에는 백인에 대한 깊은 '피해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잠재된 피해의식은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운 이웃에도 예외가 없이 적용되는 감정이다. 그가 출세를 하고 훌륭한 인품을 연마했어도 마음 깊이 상처로 있었던 셈이다. 

우리에겐 남이 가진 '다름'을 편하게 받아들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낯설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일종의 편견을 가지기가 쉽다. 그런데 그 편견이 계속되고 있다면, 그것은 집착에 가까운 것임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편견에 '의존'하여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이다. 아마도 주위의 백인들은 이 탁월한 이방인에 대하여 편견을 가짐으로써 그들의 평범성을 위로 받고 싶었을 것이다. 이처럼 편견의 시작은 의외로 마음의 균형을 잃은 '의존심'일 수가 있다. 

생존과 본원적 두려움
생존 본능을 가진 인간은 세상에 대해 '본원적 두려움'을 가진다. 이것은 태생의 순간 고고성과 함께 가지는 본원적 정서이다. 이 생래적 정서로부터 인간의 본질이 탄생한다. 
'본원적 두려움'이란 세상에 홀로 던져진 생명이 가지는 기본적 정서이다. 이것은 홀로 선 두려움과 강렬한 생존 의지와 이를 해결하려는 앎의 열망이 하나 된 '나이고자 하는 의지'의 총체이다. 우리 일생의 많은 부분은 이 '본원적 두려움'과 맞서는 노력의 과정일 수가 있다. 

오델로는 인종적 편견을 멋지게 극복하여 지성과 용기를 가진 장군이 되었고, 누구나 선망하는 지위와 명예를 얻었다. 그에게 지위와 명예는 백인사회의 편견에 맞서는 창과 방패이기도 했다. 장군이 되어 지위와 명예라는 수단에 의존했고 그것을 능숙하게 활용했다. 
우리의 삶은 삶 자체가 목적이 될 때 건강하고 행복해진다. 삶을 어떤 수단으로 삼을 때 생명을 잃는다. 본질로부터 소외되기 때문이다. 오델로에게는 어떻게 사느냐보다 무엇이 되느냐가 더 중요했다. 계급사회의 피할 수 없는 '가치전도'이다. 더구나 흑인이라는 핸디캡까지 이겨내야 했다. 비극의 뿌리는 여기서 부터 시작되었다.사는 만큼 되는 것이 순리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편에 있었다.

피해의식의 심층
그는 데스데모나를 사랑하여 결혼했지만, 그것은 자기를 질시하는 백인 사회에 대한 멋진 보답이기도 했다. 또 데스데모나를 끝내 믿지 못한 것은 자신의 '순수하지 못한' 사랑의 결과일 수가 있다. 그녀를 죽이기 까지에 이른 것은, 백인 사회의 편견에 대한 보복이며, 그가 일생을 걸고 얻은 지위와 명예의 실추에 대한 수치심과 배신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그 모든 것이 자신이 가졌던 '피해의식'에 맞서려는 몸부림일 수가 있다. 
어쩌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자신의 크고 작은 피해의식에 맞서 균형을 얻고 위로 받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오델로의 질투심과 이아고의 복수심과 로더리고의 짝사랑 그리고 심지어는 데스데모나의 맹목적인 사랑과 그녀의 아버지 브라밴쇼의 분노 까지도, 모두가 가진 내면의 생래적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가지는 일상의 부정적 감정의 심층에는 생래적 두려움이 본질로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두려움'이라는 같은 코드 code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원리이므로 그 원리를 직면하면 답을 얻는다. 무엇이든 진솔하게 직면하면 신기하게도 부정적 감정은 줄어들고 사태는 크게 완화된다는 사실이다. 진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피해의식의 본질은 두려움이다. 이것은 누구나 가지는 보편적 정서로 우리의 내면 깊이 자리잡고 있는 본원적 두려움과 맞닿아 있다. 생명이라면 모두가 가지는 본능의 언어이며 기계적 메커니즘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불편하지만 익숙한 정서이다. 이 불편한 호소는 자신이 먼저 따뜻하게 안아주며 귀 기울여 들어 주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마음의 본질로 들어가 진정한 자기 가운데 설 수가 있다. 이때 우리는 진실해지며 진리와 하나 됨을 느낀다. 이로써 본연의 야성을 온전히 회복할 수가 있다. 이를 우리는 자기 이해 또는 통찰이라고 부른다.

통찰, 자연원리적 메커니즘
우리의 감정과 행위는 복합적이지만 이처럼 자연 원리적이다.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들은 자신에게 유리하게도 불리하게도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보는 것이다. 이때 자연 원리적이며 기계적인 (있는 대로 논리적인) 마음의 원리를 볼 수가 있다. 자연 원리적인 마음에 대한 이해는 나를 이해하고 이웃과 세상을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수많은 소설과 문학적 성찰은 결국 이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오델로의 이야기는 '피해의식'이 가진  보편적이고 파괴적인 메커니즘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 인간 행동의 고전적 모델이다. 그의 피해의식은 표면적으로는 피부색에 대한 편견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 심층에는 누구나 가진 생래적인 '본원적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델로에 나오는 주인공과 배역들 모두는 각자가 가진 '본원적 두려움' 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소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오델로는 지위와 명예에 의존함으로써, 데스데모나는 자기가 가지지 못한 높은 지성과 남성성에 대한 순수하지만 맹목적인 사랑에 의지함으로써, 이아고는 자신의 무능과 저열한 심성을 염세적이고 냉소적인 세계관에 의탁해 위로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즉효가 있어 보이는 '허상'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그 허상은 대개 사회 통념적 가치들이다. 이것은 우리를 구속하는 관념의 틀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에 의존하기도 하고 구속되기도 한다. 결국 우리 주인공들은 그 허상에 의지해 자기가 지닌 운명적인 '본원적 두려움'을 해결하고자 애썼던 것이다.
우리들의 알 수 없는 욕심과 욕망, 때로 종잡지 못할 충동 또한 자신의 본원적 두려움에 대항하려는 노력임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역동은 자연 원리적이며 기계적인 운동임을 이해할 수가 있다. 진솔하게 자신의 마음과 직면하면, 설명 가능하고 이해 가능하며 그래서 통제 가능한 것이 된다. 이러한 자연 원리적 메카니즘은 일찍이 스피노자에 의해서도 주장 된 바가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인간 정서는 자연적 사건들이다. 모든 자연적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나며, 그 법칙에 의해 이해될 수가 있다.”
- 스피노자, 에티카 Ethica

우리 마음의 호소는 있는 그대로 알아주고 직면하면 저절로 해결 되는 문제들이다. '감정의 직면'은 마음의 호소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과정이다. 직면하는 순간 진실을 알게 되므로, 합리적 대응이 가능하며 해결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홀로 서는 야성
물질로부터 비롯된 생명인 인간은 물질 순환의 시스템에 의존하는 운명이다. 물질 순환 시스템의 중심에는 인간 사회가 있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임을 말해 준다. 오랜 양육의 기간을 거치며 문명에 길들여진 인간은 '의존적 근성'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의존심을 '노예 근성'이라 부르며 스스로 경계하지만, 어느 순간에 다시 그곳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것은 기억 저편의 무의식에 자리하여 아직도 보살핌과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는 '본원적 두려움'일 수가 있다.  

홀로서기란 남과 외부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하여, 길들여지지 않은 본래의 야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우선 물질적 독립을 이루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 된다. 또한 물질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습관을 떨칠 필요가 있다. 어디서나 의존은 곧 구속이 되어 돌아온다.
다음으로 심리적 홀로서기다. 가장 먼저는 앞서 말한 바처럼 모두가 지닌 '본원적 두려움'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될 것이다. 자신이 가진 '본원적 두려움'에 대한 이해를 통해 보편적 인간의 정서를 통찰하여 '정복'하는 것이다. 

다음은, 나와 내 밖의 세계의 '경계'를 분명히 긋는 것이다. 남과 비교할 이유가 없다. 바깥 세계에 의존하면 늘 흔들리기 마련이다. 외적 가치와  과시적 허장성세에 의존하지 않는 일이다. 이들은 도움이 되기 보다는 굴레가 되어 돌아오기가 쉽다. 
다음으로, 우리는 누구나 혼자라는 본질적 자각이다. 누구나 혼자 왔다가 혼자 간다. 안타깝지만 연인이나 부부 사이도 예외일 수가 없다. 각기 홀로 설 수 있어야 함께 든든히 설 수가 있다. 독립된 개인으로 만나 사랑과 믿음을 쌓는 과정이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자연 원리임을 알게 된다.


그림/ 자등명법등명 自燈明法燈明.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붓다의 마지막 법문으로 알려진다.   

'홀로서기'는 자연의 엄정한 명령과도 같다. 자기 밖의 무엇에 의지하지 말고 자기의 지혜와 진리에 의지하라는 명령이다. 
우리의 마음이 가지는 문제의 대부분은 홀로서기가 되지 않아 일어나는 현상임을 알 수가 있다. 오델로 처럼 무상한 내 밖의 무엇에 너무 의지하지 않는 일이다. 너무 의지하지 않으면 집착하지 않는다. 
스스로 진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홀로서기는 결코 외롭지 않는 길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삶은 본원적 두려움을 딛고 홀로 서서, 주인된 자로 자유를 누리는 일이다. 이것이 셰익스피어가 희곡 오델로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메타 인문학 1.0 , 마음의 과학에서 

자료/ 세익스피어의 희곡 오델로
https://youtu.be/x6w07VuA68I


"오셀로" by 셰익스피어 한번에 끝내기 (문학줍줍 책 요약 리뷰 | Book Review)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를 여러분의 손에 쥐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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