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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Jan 17. 2023

메타인지와 원리적 앎

메타인문학 06  

두개의 세계

우리는 두 세계에서 산다. 익숙한 세계와 진짜 세계이다. 기억을 해보면 우리는 지금의 익숙한 세계에 처음 길들여지던 때를 떠올릴 수가 있다. 가령, 이것이 분명 이치에 맞는 데 세상은 자꾸 저것이라고 하는 느낌이 들던 때가 있었다. 아주 어려서일 때도 있었고, 심지어 최근의 일도 있다. 갈등이 생기지만 ‘힘들기 싫어’ 세상을 따랐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처음에는 좌절과 약간의 굴욕감도 느끼지만 잊어버리자면서 자신을 설득한다. 점점 세상에 길들여지는 과정이다. 그러나 마음 안에는 갈등과 상처로 남는다. 때로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쌓일 수도 있다.

이런 기억은 우리가 지금도 ‘익숙한 세계’와 ‘진짜 세계’ 사이에 있음을 알게 한다. 또 익숙한 세계란 이미 길들여진 세계다. 우리가 진작 안 사실이지만 잊고 싶었던 진실이다. 무엇이 진실의 세계인가? 우리의 삶은 이 물음에 일생을 두고 답을 하는 과정이다. 언젠가는 진실한 대답을 해야 한다. 
더 이상 유예하지 말고 우선 나에게 말해야 한다.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렵다고 '지레짐작'만 했던 일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일일 뿐이다. 그래야 아귀가 맞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본원적 두려움’에 대한 이해
따지고 보면 더 이상 세상에 길들여 살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왜 세상에 굴복하고 살았을까? 때로 세상이 나에게 겁박을 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것 이상으로 미리 굴복한다. 왜 그랬던 것일까? 자신에게 주어진 본능과 생각하는 힘을 부인하고 왜 세상을 따랐던 것인가?  스스로 '홀로서기'를 왜 회피했을까? 그것은 의존심 같은 것이었다.

아득한 기억 저편에서, 우리가 처음 세상에 던저졌던 순간의 두려움, 그 ‘본원적 두려움’이 자꾸 의존심을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분리된 모체에 대해 간절한 회귀적 갈구가 남아 있어서 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도 무언가에 의존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홀로 서지 못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세상과 맞서기를, 망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에 대한 뚜렷한 통찰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과제이다. 우리는 언제 이것을 알아차렸던 것일까?



원리적 앎

우리는 본래부터 주체적 의지와 인식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은 우리의 기억과 경험에서 확인되며 학문적으로도 정립된 진실이다. 우리의 ‘나이고자 하는 의지’는 기회를 획득하고 위험을 극복하며 삶을 영위 한다. 
이 주체적 의지가 우리의 의식과 영혼의 본질이다. 생존을 위한 논리적 사유 과정이 감성과 이성의 실체이다. 그래서 우리의 앎은 본질적으로 내 밖에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내 안에 가진 나의 '인식 체계'에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통한 앎이 우리가 지닌 ‘본원적 앎’이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려 한다. 이것은 스스로 세상에 길들여지고 종속됨을 자청하는 일이다.  지식과 정보는 늘 변하고 바뀌며 끝이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앎이다. 의존적이며 소모적인 앎의 길이다. 이것을 해결할 길이 없을까?  이것은 본래의 앎으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다.
길들어지지 않고 상처받지 않은 ‘본원적인 앎’을 되찾으면 된다. 잊었던 본능적 앎을 회복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오래도록 어렵게 말해온 ‘돈오 頓悟’의 본질이다.

정보화는 모두에게 지식과 정보의 홍수 시대를 선물했다. 보다 효율적이며 근본적인 앎과 정보처리의 방식이 요구되고 있다. 지금처럼 지식과 정보 중심이 아니라, ‘원리적 앎’이 요구된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적 세계 이해가 아니라 원리적 세계 이해이다. 이러한 ‘원리적 앎’은 앎의 목표를 기존의 ‘지식과 정보 중심’에서 ‘원리 중심’으로 가져가는 일이다. 나의 '인식 체계'인 본연의 직관에 의탁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부분에서 이미 앎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있는 그대로 보기
지식과 정보는 한시적이어서 늘 최근의 것을 요구하게 된다. 또 고정된 지식과 정보는 선입관과 편견 등 인식 오류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오래되어 쌓이게 되는 지식과 정보를 버리고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업데이터) 과제를 안고 있다. 이 두 가지 과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근본적 대안이 '원리적 앎 causal cogni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태생적이며 본능적인 앎의 방식이었다.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시적 효용을 가진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지 말고 ‘자금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더 균형 되고 조화로운 제 1차적 앎임을 이해할 수가 있다. 지식과 정보는 단지 그것을 돕는 참고 자료일 뿐이다. 이것이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진짜의 앎을 얻는 방법이 된다. 그런데 그 방법이란 어떤 것인가?

-메타 인문학 1.0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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