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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Dec 24. 2022

Why와 What의 역사  반야경

반야경 般若經의 비밀


Why와 What의 역사

자유, 멈출 수 없는 혁명

자유의 길 - 불교 5


반야경般若經의 비밀


불교는 마음의 과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는 변화하는 복잡한 현상 속에서 그것을 일으키는 원인과 운동 원리를 알고 이를 효율적으로 제어하려고 한다. 불교는 마음에 대해서 그것이 생겨나고 역동하는 원리를 알아, 누구나 마음의 주인이 되는 방법을 밝히고자 했다. 반야경般若經은 이것을 다룬 인류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의 과학


마음에 대한 불교적 이해는 유교의 성리학과 양명학, 근현대 철학의 인식론, 심리학, 심지어 컴퓨터공학, 인지과학 Cognitive Science 및 이들을 종합한 뇌과학 Brain Science : neuroscience 등에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이해된다.


반야경般若經의 반야般若는 '근원적 지혜'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일반적 사량분별思量分別의 지혜보다 앞서 있는 '근본적 지혜'이다. 누구에게나 이미 있지만 누구나 가질 수는 없는 지혜이다. 왜일까?


우리가 가진 지혜의 거울에 낀 얼룩들 때문이다. 이 얼룩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잘못된 인식 습관이 만든 선입관과 편견들 때문이다. 이들이 우리의 근원적 지혜를 가리고 있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현장의 동상/

실크로드의 투루판에 있는 고창高昌왕국의 고창 고성 앞에 세워져 있다


불교의 반야경은 지혜의 거울에 낀 편견의 얼룩을 지우는 방법을 '간단히' 알려준다. 여기서 사용되는 주된 개념 도구는 '공空'이다. 이것은 복잡한 세계의 본질과 우리의 편견을 함께 보게 한다. 본질을 앎으로써 비본질적 요소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일을 없애려는 것이다.


불교는 세계를 어떻게 보았을까?


불교는 고유의 '연기론緣起論'을 바탕으로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인과론적 세계관을 가진다. 인과론을 기반으로 하므로 이것은 과학적 세계관과 기본적으로 같다. 이것이 불교가 가지는 강력한 설득력의 바탕이 된다.


현실 세계는 겉보기 세계인 '현상'과 이것을 이루어 내는 '본질'로 되어 있다. 현대의 과학적 이해에서도 세계를 '물질 현상'과 이것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과학적 이해에 따르면, 세상은 약 138억 년 전 빅뱅 이후 초고온과 초고압의 프라즈마 이온 상태의 양성자(+)와 전자(-)가 견고하고도 다양하며 섬세한 논리적 결합을 통해 이루어 낸 물리적 세계이다. 이 물질세계를 기초로 생명이 탄생하고, 생명이 가진 생존 의지가 정신세계를 낳았다.


생명의 정신 현상은 생명이 '나이고자 하는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자신의 내·외부 세계와 부단히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룩한 자연 원리이다. 이 원리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효율의 원리'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최소의 에너지로 최대의 생존력을 담보하려는 것이다.


우주 자연의 원리는 인간의 지혜의 원천이다. 이 둘은 같은 원리로 이루어지며 같이 작동한다. 우주 자연과 생명의 운행 원리는 최고의 '효율'을 지향하는 자연 원리적 완전성을 가진다. 이 자연원리적 지혜가 138억 년 동안의 항구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우주 자연의 중심 원리로 이해할 수가 있다.


'효율의 원리'는 관념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 살아 숨 쉬는 보편 원리다. 이것은 모든 인과관계의 기초이자 모든 원리의 근본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우리의 본능적 직관으로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사회 공동체를 이루는 기본 원리로도 있다.


가령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30개가 넘는다. 그 모양과 길이는 제 각각이지만, 대표적 기본 원리(meta 원리)는 같다. 직선이라는 것이다. 두 지점의 '최단 거리 shortcut'가 직선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큰 지혜인 '마하반야摩訶般若'는 우주 자연의 원리를 알게 하는 지혜의 원천이다. 이것이 불교가 2,500년을 넘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왕성한 생명력을 지니고, 인간에게 마음의 지혜를 제공해왔던 비밀이기도 하다.



마하반야摩訶般若


이러한 이해는 새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새롭지가 않을 것이다. 마하반야摩訶般若의 '마하摩訶'는 비길 데 없이 크다는 뜻이다. 이 말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라는 말이다. 우주 자연을 관통하는 매우 흔한 원리라는 것이다. '반야般若'는 이처럼 소박하지만 넓고 큰 지혜이다. 도처에 널려있는 이 지혜는 우주자연의 일반 원리일 뿐이다. 그래서 반야는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은 노자老子의 도道와도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담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은 제목 대로, 큰 지혜(마하반야摩訶般若)를 이루어서 그곳에 이르는(바라밀다波羅蜜多) 핵심 된 가르침(심경心經)을 담은 260자로 된 경전이다.


이것은 당나라 삼장법사 현장玄奘(602~664)이 660년부터 663년에 걸쳐 한자로 번역한 600권 분량의 '대반야경'을 그가 다시 요약해 독송하기 쉬운 주경呪經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이 가르침은 큰 지혜摩訶般若를 얻는 기본적 방법론과 그것을 얻었을 때의 기쁨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게송偈頌(노래)이나 주문呪文(염불)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것은 깨달음의 시작과 그 결과인 끝을 노래한다. 그러나 과정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시작과 끝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다양한 방법론들이 불교의 발달사로 볼 수가 있다. 여기에는 시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고승과 학승과 불자들의 도전적 지혜들이 숨어 있다. 이것은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밝혀진 원리를 익혀 새로운 원리를 발견하는 것, 새로운 앎과 보다 효율적이고 차원 높은 원리를 찾는 도전의 과정이다. 이것의 가장 모범생이자 우등생은 '자연과학' 임을 우리는 인정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자연 과학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가 있을까? 자연 과학이 성취한 검증된 방법론을 따르면 매우 효율적일 것이다.


먼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살펴보자. 한자로 된 원문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한글로 해석해 풀어 보았다.


주) 여기서 '공空'은 물리적 실체가 없는 것, 즉 보이고 만져지는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보다 가까운 이해가 되리라 본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이르는 큰 지혜의 핵심이 되는 말씀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중생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이는 깊고 큰 지혜를 행할 때, 몸과 마음이 모두 공空한 것임을 비추어 알게 되어, 모든 고통을 넘어 진리에 이르게 되니라.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야, 존재가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이 존재와 다르지 않기에, 존재가 곧 공이고 공이 곧 존재이니, 우리의 감각과 인식과 생각과 의식도 그러하니라.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야,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공空하므로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느니라.


是故 空中無色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무수상행식


이렇기에 공空한 가운데 실체가 따로 없으니, 우리의 감각과 인식과 생각과 의식도 같으니라.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도 실체가 따로 없으며, 존재와 색깔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그 현상도 실체가 따로 없으니, 이것과 이것을 의식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없느니라.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모름도 없고 모름이 다하는 것도 없으며 , 늙고 죽는 것이 없기에 늙고 죽는 것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느니라.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괴로움이 실체가 없기에, 괴로움의 원인도 괴로움의 사라짐도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지혜도 없고, 지혜가 따로 없기에 얻을 수 있는 지혜 또한 없느니라.


以無所得 故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

이무소득 고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이렇게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진리를 얻은 보살은 오직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는 지혜'로 진리에 도달하느니라.


故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그러므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고, 걸릴 것이 없으면 두려울 것이 없어서, 뒤바뀐 몽상을 넘어,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한 열반으로 들어가느니라.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깨달음을 얻은 자들은, 모두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의지하니, 최고의 지혜를 얻느니라.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 일체고 진실불허


그러므로 그대로의 것을 보는 지혜에 이르는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로운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최고의 주문이며 비길 데가 없는 주문이니, 능히 일체의 고통을 없애므로 진실로 허망하지 않느니라.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그래서 반야바라밀다 주문을 일러주니 다음과 같이 주문을 말하느니라.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저 피안의 세계로 가자. 모두 함께 저 피안의 세계로 가자. 오, 깨달음이여, 축복이어라.


*주문이므로 따로 번역을 하지 않으나 대강의 뜻은 이렇게 알려지고 있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반야般若의 꿈


이 게송偈頌의 끝에 이르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우리는 언제 어디쯤에서 반야般若를 얻게 될까?

반야심경 般若心經은 말 그대로 핵심 원리만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 일반인들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때는 앞뒤의 맥락을 다시 살펴 연결 지을 필요가 있다.


반야심경의 처음은 '관자재보살 觀自在菩薩'로 시작한다. 이것은 당나라 초기 고승이며 반야심경의 작자인 현장 玄奘(602 ~ 664)이 산크리스트어의 ‘아바로키테스 바라 Avalokitesvara’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의 뜻은 아바로 기타 Avalokita의 ‘관觀(보다)’와 이스바라 isvara의 ‘자재自在(스스로 있는)’를 합한 것이다. 따라서 관자재보살은 ‘스스로 있는 것을 보는 수행자’란 뜻이 된다. 그런데 이 이상적인 수행자는 불교가 대중화 되는 과정에서 '관세음보살' 등으로 표현되어 '영험을 가진 부처'로 알려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절에서 '관세음보살'로 상징되고 표현되고 있는 관자재보살의 진면목이다. 이것의 시작은 모든 불제자를 지칭했다. 즉 스님과 재가 불자로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들이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과 지혜를 얻으려는 사람들 모두를 말한다. 더욱 일반화하면 지혜를 구하는 우리들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반야심경의 시작인 '관자재보살 觀自在菩薩~'을 그냥 '나는~'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오히려 이것이 붓다의 뜻에 부합하는 가르침임을 알 수가 있다. 관자재보살과 관세음보살은 반야般若의 꿈을 가진 우리인 것이다.


또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지혜란 그 첫 구절의 내용처럼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들은 대로 보지 말고, 남이 말하는 대로 보지 말고,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면 이미 거기에 답(지혜)이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 말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갖은 편견을 벗고 온전히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사실 우리는 내키지 않고 싫고 정직한 진실은 곁 눈으로 흘겨보거나, 외면하거나, 심지어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임을 알 수가 있다. 찬찬히 정면으로 요모조모를 따지며 보아도, 알까 말까 하는 진실을 우리는 이렇게 보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물리적 시각 만으로도 이들은 진실을 직면할 수가 없는 명백한 편견임을 알 수가 있다. 사정이 이러할 진데 우리가 과연 '반야般若'를 꿈꿀 수가 있을까? 그러나 반야심경은 방법을 말해준다.


그림/ 직심直心

마음을 있는 그대로 직면함으로써 마음의 원리를 깨닫는다


직심直心, 홀로서기와 반야般若의 길


'직심直心'에 대한 불교적 해석이 여럿 있지만, 여기서는 일관되게 '직면直面'으로 풀이한다. 유명한 법어인 '직심시도량 直心是道場'도 여기서는 '마음을 직면하여 마음의 원리를 깨닫는다'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이 직심直心이란 것이 쉽지 않다. 먼저 나부터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다. 이것이 '직심'의 성패를 가르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로다. 누구도 아닌 나에게만큼은 내게 솔직해도 되는 일이다. 이것은 반야를 향하는 첫걸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자신에게 솔직한 것은, 모든 것을 제대로 풀며 모든 것이 제대로 풀려가는 시작이다. 우리는 자신에게만큼은 솔직할 이유가 있다. 우선 자신을 관용하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다. 이때 나는 나의 자리를 되찾아 자기 회복을 이룬다. 내가 다시 나 되는 순간이다. 자신을 관용하지 못하면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리고 더욱이 자신을 닮은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에게 솔직해도 되기 때문이다. 솔직한 자기와 친해져도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는 일'이다. 자연 원리적인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를 닮은 이웃도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오랜 습속과 물질문명이 가진 '자기기만'에 우리가 얼마나 노출되어 왔는지를 직면할 수가 있다.


이것은 때로 두렵기도 하다. 내 마음을 내게 들키는 낯선 기분도 든다. 이것은 본래의 내가 친숙해지지 않아서다. 친숙해지면 모든 것이 그만한 이유 reason가 있으며, 그것이 자연 원리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본래의 소박함과 순수함을 되찾게 된다. 마침내 세상이 정연하고 조화로운 진리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알고 따르게 되며, 그러한 자신을 사랑하고 의지하게 된다. 진리는 효율적이고 생산적이며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초기 경전인 '아함경'은 이렇게 노래한다.


자등명 법등명 自燈明 法燈明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리


이처럼 '있는 그대로 보면' 우리는 진리와 익숙해지고 가까워진다. 진리와 친숙해지는 것을 우리는 '안다'라고 한다. 우리의 앎은 이렇게 얻어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앎의 원리를 터득하는 과정이자, 세상을 향하여 홀로 서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홀로서기'란 진리를 알고 의지함으로써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그러한 자신을 사랑하며 의지하는 과정이다. 앎은 앎을 낳아 더 큰 앎으로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심적 물적 홀로서기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되므로 '반야 般若'에 이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불교에서 신앙하는 관자재보살은 누구도 아닌 반야를 가진 '나'이며 '이웃'임을 알 수가 있다. 


후기:

반야경을 읽으며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오늘날 불교가 상업화되고 이에 따라 이념화 되었다는 점입니다.

현실적 불교의 지혜는 우리가 가지는 자연 원리적인 '희로애락 애오욕'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되, 그것이 실체가 없는 '공空'임을 이해하고 너무 이끌리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세속의 불교는 '오욕 칠정'을 온전히 끊을 수 있음을 강조하지만, 몸과 마음을 가진 유기적 생명인 인간은 구조적으로 이것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는 과학적이며 현실적 이해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만 이러한 과학적 이해에 기반하여, 우리의 마음 작용은 자연원리에 따라 일시에 일어나 사라지는 실체가 없는 '공空'이며, 참나가 아니므로 너무 이끌리는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이해해 봅니다.


#메타인문학1.0

#아포리즘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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