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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Mar 17. 2023

고전 속의 인식론 / 반야경般若經

#인문 #인식론

 VI 고전 속의 인식론 / 반야경般若經


 삶은 매 순간 인식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식은 삶의 중심이 된다. 인식론에 관한 이해에서 떼 놓을 수가 없는 것이 불교 사상이다. 불교 사상은 능히 '인식의 과학'이라고 부를 만하다. 불교의 출발은 인간이 겪는 불명확한 앎과 이로 인한 번뇌에 대한 붓다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이 문제를 논리적 인과의 원리로 해결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고집멸도苦集滅道'의 깨달음의 과정이다. 불교의 '연기법'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즉 집착(集)이 고통(苦)을 가져오는 근본 원인임을 깨닫고, 원리(道)에 따라 소멸(滅) 시키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이 원리의 근본을 공(空: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가 없음, 곧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명료하다. 세상 만물에는 집착할만한 실체가 없으니 고통스러워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깨달음의 요지로 볼 수가 있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존재는 빈 것과 다르지 않고 빈 것은 존재와 다르지 아니하며, 존재는 즉 비었고 빈 것이 즉 존재이니, 감각과 생각과 행함과 의식도 모두 이와 같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존재를 '공空'으로 환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것이 가능했다면 지금의 세상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 것인가?
 그러나 모든 존재를 '공空'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관점은 지나치게 초월적(관념적, 비경험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과학적으로 분명 공空으로 환원될 수가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환원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 물질은 환원되어 온전히 공空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空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 만이라도 찾아낼 수가 있다면, 인식 오류 중 많은 부분은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하다.

 우리는 오감 (5 온蘊: 다섯 가지 감각 요소)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한다. 그런데 오감에서 얻어지는 감각자료는 모두가 실체가 없는 공空인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일종의 '감각신호 signal'에 지나지 않으므로 불교적 개념으로는 전형적인 '공空'이다. 여기로부터 마음이 일어나니, 여기서 비롯된 그 마음은 또한 공空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경향(착각)이 크며, 이로 인해 온전한 인식을 방해받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공空이라는 개념은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에 대한 통찰 만으로도 상당 부분의 착각과 번뇌를 해소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공空은 관념이다. 특히 고정관념으로 작용하는 선입관과 편견이 대표적이다. 본래 관념은 인식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도구이다. 
 이것은 대상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해야 하는 데, 특정한 도구를 고집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고정관념인 셈이다. 관념의 최소 단위로서 개념이 지닌 언어, 문자 또한 불완전한 인식의 도구이다. 그래서 일찍이 이를 주목해 선불교에서는 불립문不立文字(글로서는 진리를 모두 표현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이들 관념적 도구로는 대상을 온전히 포착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 대상을 직관하는 데도 계속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고정관념이 바로 실체가 없는 '공空'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만 해소해도 상당 부분의 인식 오류와 번뇌를 줄일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고정관념의 하나이지만 인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기억 데이터'이다. 이것은 지나간 기억이므로 일단 모두가 '과거형 데이터'이다. 그런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기억을 불러 내어 현재를 판단하기 쉽다. 이미 한번 판단되었던 자료이므로 손쉽게 판단 기준으로 삼으려는 생각이다.
 만물은 변화 속에 있으므로 과거형 데이터는 현재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계속 현재형 데이터로 동기화 또는 업데이트를 해야 하는 데, 우리의 기억은 이것을 자동적으로 수행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의 인식은 '바로 지금 현재'의 상황을 보고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이 가장 정확한 것이 된다. 

 이 지혜를 알고 행하는 자를 불교에서는 '관자재보살 觀自在菩薩'이라고 한다. 붓다가 이를 말한 산스크리스트 어 'avalokitesvara 아바로키테스바라'의 본래 뜻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자'이다. 이후에 여기에 해석이 다양하게 덧붙여져 결국 신앙의 대상으로 변해 '관세음보살'이 되기도 했다.  
 당나라 고승으로 인도에 직접 간 현장玄奘(602년~ 664)은 'avalokitesvara'가 인도에서는 avalokita가 보다는 뜻인 관觀으로, īsvara는 스스로 있다는 뜻인 자재自在라는 말임을  확인한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관자재 觀自在'라고 옮겼다. 당시 인도인들은 그렇게 사용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대당서역기 주석) 이것은 당시까지 구마라집 鳩摩羅什(344~413)이 의역한 '관세음觀世音'이 오역임을 밝혔다. 그러나 그 후에도 관세음보살의 이미지는 '기복 신앙'의 흐름을 따라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관자재보살 觀自在菩薩'은 누구나 자기의 내면에 타고난 지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자신을 구제하는 것은 결국 밖의 무엇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지혜임을 말한다. 이것이 붓다의 핵심적 가르침라고 이해된다.

한편 선불교에서는 '관자재 觀自在' 할 수가 있는 '자기 이해'의 방법으로 선禪을 제안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선禪은 자신과 대상에 대한 현재적이고 종합적인 직관을 얻는 방법이다. 모든 종류의 고정관념과 변화무쌍한 오감의 감각신호 signal에 구애되지 않고, 인식의 주체가 되어 온전한 본연의 인식을 얻는 과정이다. 

 불교적 인식론은 이처럼 실용적이고 탁월한 면모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존하는 물질까지 '공空'으로 이해하는 초월론은 기계적 연역으로 나아가 유심론(오직 마음뿐)으로 경도될 수가 있다. 경험적으로 우리는 유심론만으로는 온전한 인식을 얻을 수가 없음을 알게 된다.
 물질계는 물질계 고유의 원리를 따라 엄존하는 세계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현실세계는 물질계의 토대 위에 구성되어 있고, 여기로 부터 인식세계가 펼쳐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공空'의 원리가 현실에 맞지 않는 영역이 분명 있음을 헤아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음은 유심조唯心造이나, 만물은 유심조唯心造가 아닌 셈이다. 그러나 마음이 유심조인 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불교적 인식론은 이미 최고의 자리에 있다.

 생명과 물질, 인간과 물질 간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물질에 대한 집착도 옳은 일이 아니나, 물질을 외면하는 것도 현실적이지도 옳지도 못하다.
 물질에 대한 현실적 해법, 공정하고 바른 해법을 내놓는 것은 인간의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의 중대한 관심사이자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유독 정신과 마음 세계에만 관심을 집중해 왔다. 종교의 사회적 힘이 여전히 강력한데, 물질에 이에 대한 바람직한 해법을 명백하게 말하는 종교는 역사 이래 아직 보질 못했으니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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