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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Aug 05. 2023

Why와 What의 역사 27. 두 문명의 인간관


#역사


 Why와 What의 역사

27. 두 문명의 인간관


사람 VS 인간

우리는 '사람'과 ‘인간’을 같은 말로 이해한다. 앞뒤 순서도 없어 같이 대접을 해 준다. 그런데 좀 다르다.

사람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인간人間은 한자어로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뜻이니 무언가 추상적인 뜻을 담고 있다.

'사람’이라는 말은 무엇일까? 아마 '살아있는 것’이나 '살림’이나 '삶'에서 비롯됐을 법하다. 매우 폭이 넓은 말이다. 그러면 인간人間이라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말 그대로 '사람과 사람의 사이'라는 말인 데, 사람 사이에 대체 무엇이 있다는 말일까?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은 '관계'일 것이다.

한편 서구에서는 사람은 Human이다. 그 어원은 흙 Humus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역시 그들답게 발상도 질료적이고 사실적이며 과학적이지 않는가.



관계 속의 인간

사람을 인간人間으로 부르게 된 것은 인구의 밀집도가 이미 높아진 고대 동아시아 중원에서 사람 간의 사회성이 요구되었던 시점에 채용되었을, 사회적 바람과 기대 또는 규율을 담은 호칭이 아니었을까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은 사회적 삶을 산다.

개인은 그가 속한 사회에서 한 구성원으로서 스스로 그 역할을 선택하거나 부여받는다. 그가 부여받은 사회적 역할은 그와 사회와의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또한 그 사회의 다른 일원들과의 관계도 이것을 기점으로 연결되고 확대되어진다. 그의 역할이란 그가 사회에 제공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 value'가 될 것이다.

한 개인을 이렇게 '사회적 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서구의 '개인주의'와는 대조적이다. 두 문화는 자연을 보는 관점뿐만 아니라 인간을 보는 관점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셈이다. 이것은 사람을 '개인'으로 보느냐 사회적 '관계'로 보느냐의 차이다.

사람이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는 가는 모든 발상과 생각의 기초가 된다.





관계와 권력
우리 각자는 자주적 의지를 가진 '개인'이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관계'로 이름 지어진다. 가령 누구의 딸과 아들 또는 어머니와 아버지로 그리고 어느 직장의 어떤 직위의 무엇을 하는 사람으로 사회적 '관계-역할'로 불리어지게 된다.
그러면 나는 누구일까?
나는 먼저 자주적 의지를 가진 '개인'이며, 그다음은 내가 가지는 사회적 '관계'일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자기규정의 순서일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인간의 원리보다 앞서는 이치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개인이 사회의 일원이 되는 단계적 과정으로도 이해될 수가 있다.

단계적 과정은 앞 단계의 완성을 기반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되므로 개인의 성숙은 사회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는 관계보다 앞서는 것이 순서에 맞는 것이다. 이것이 건강한 개인주의의 보편적인 모습일 것이다.
따라서 관계가 부당하게 개인을 구속하는 경우가 많다면, 이러한 문화나 사회구조는 원리에 맞지 않는 것이 된다.
예외적인 것은 공인公人의 경우이다. 공인은 사회적 관계가 개인의 이익에 우선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사람이다. 공인은 자신을 먼저 관계 속에 세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따라서 개인으로서의 완성도가 그것을 행할 만큼 매우 충실할 때 가능한 일이다. 공인은 스스로를 충실히 완성하고 이를 넘어 사회적 관계를 담임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이것이 공인의 도덕성을 따지는 주된 이유가 된다. 공인公人의 길은 이렇게 어렵고 엄중하다.

관계의 원리, 공감 Sympathy
나 아닌 모든 존재를 ‘타자’로 부른다. 세상은 결국 너와 타자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타자에는 타인과 자연, 자연 속의 생명체와 무생명체를 포함한다. 이들 타자는 나와는 어떤 관계를 가지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또한 나는 그들에게 어떤 관계이며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서로의 무엇이 되어 만나고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한 뼘만큼의
마음만 열면 볼 수가 있다.
나의 모습에서 타자의 모습을,
타자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우리는 대자연의 땅에서
같이 태어나서 서로 부대껴 교감하며
같은 정기를 마시며
함께 호흡하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서로의 모습에서 서로를 본다. 우리는 대지라는 같은 뿌리에서 각기 홀로 태어나지만, 다시 하나로 만난다. 우리가 지닌 공감 Sympathy은 이러한 심정적 균형 감각일 것이다. 우리는 각기 자유로운 영혼이면서 서로 연결된 존재들임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과 '관계'는 하나로 만난다. 또 이를 통해 동서 두 문명의 세계관은 하나가 될 수가 있다.

'관계'는 이처럼 자연이 만든 원리이다. 서구는 이것을 자연법 natural law으로 해석했다. 그들은 인간을 물리적으로 동등하게 보았으며, 평등한 인간관계를 자연의 원리로 보았다. 또한 자연의 일원인 인간의 원리로 본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은 여기로부터였다. 이것을 법의 원리와 입법의 정신으로 삼았다.
-인간은 자연원리적으로 평등하다. 서구는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파악한 뒤에, 오늘의 번영과 세계의 리더십을 손에 쥔 것이다. 평등한 모든 사람들의 잠재력을 아 끌어낸 결과였다.
이것을 우리는 '민주주의'라 부른다. 인간의 성공적 민주주의는 그가 만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부패와, 이 약점을 틈탄 구시대적 전체주의의 도전으로 오늘날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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