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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May 26. 2023

아발로키테스 바라 Avalokitesvara 2


#메타인문학 #인식론 #불교 #metahumanities


아발로키테스바라 avalokitesvara 2


앎의 최고 경지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으로 말해진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진실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모든 인식에 있어서 이 진리는 변함이 없다.


이 큰 지혜를 알고 바르게 행하는 자를 불교에서는 '관자재보살 觀自在菩薩'이라고 한다. 붓다가 산스크리스트어로 말한 'avalokitesvara 아발로키테스바라'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사람)'을 뜻했다. 이것이 붓다가 세상에 전한 최고의 지혜로 꼽힌다.

이후에 여기에 여러 해석이 덧붙여지게 되어, 나중엔 신앙의 대상으로 변하면서 '관세음보살'이 되기도 했다.


당나라 고승으로 인도에 직접 간 현장玄奘(602년~ 664)은 'avalokitesvara' 중에서 avalokita는 본다라는 뜻인 관觀으로, īsvara는 스스로 있다는 뜻인 자재自在라는 말로 쓰임을 확인했다.


그래서 이것을 '관자재 觀自在-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자)'으로 옮겼다. 당시 인도인들은 그렇게 사용하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의 '대당서역기' 주석).

이것은 당시까지 구마라집 鳩摩羅什(344~413)이 티베트 불교를 바탕으로 번역한 '관세음 觀世音'이 오역이었음을 밝혔다. 이것은 중국보다 앞서 불교를 전수받은 티베트에서 불교를 신앙화했기 때문이었다.

현장 이후에도 관세음보살의 이미지는 '기복 신앙'의 흐름을 따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붓다의 높은 가르침을 일반 민중에게 온전히 전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승려들이 자신의 세속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자연스러운 방편이었을 수도 있다. 옛날의 순박한 민중이 자신보다 높은 권위나 신앙에 의지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정서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늘날은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문화 발달로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쉬어졌다. 누구나 마음만 먹는다면 '관자재 觀自在'할 수 있는 것이다.


붓다는 자기를 딛고 심지어는 죽이고 진리로 나아가라고 가르쳤다. 모든 권위와 우상과 허상을 깨뜨리고 오직 진리에 의지하고 또 진리를 지닌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고 가르쳤다. 진리는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했다. 진리란 자연 원리적인 합리일 뿐이다. 이것이 현대어로 된 진리에 대한 일반적 해석이 된다.

붓다의 탄생게는 말하고 있다. 삼라만상의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제1의 지침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尊

오직 나 되어 홀로 서라


사람은 홀로 설 수 있도록 갖추어졌으니, 자신의 지혜와 자연의 진리에 의지하라. 그리고 다른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이것이 최고의 지혜라는 것이다.


자등명 법등명

自燈明 法燈明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관자재 觀自在'란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고 가르친다. 밖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자신이며,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인식적론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최고의 앎일 것이다.

진리는 모든 것에 있는 '보편적 universal' 존재 형식이다. 이들은 다양한 물리 현상과 생명 현상에 자재自在 한다. 나와 너 안에 이미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붓다의 본래의 가르침이었다.


또 붓다는 모든 존재는 인과관계로 이루어진 현상일 뿐이라고 보았다. 불변의 실체 Brahman는 없으며, 따라서 불변의 나 atman 또한 없다는 깨달음이다. 더구나 그것을 쫓는 인간의 생각과 상념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의 깨달음은 오래되고 경직된 2분 법적 세계관을 깨뜨린 큰 지혜이다.


그러나 오늘날도 '2분 법적 세계 인식'은 공고하다. 그래서 본래 하나인 세상을 2분법으로 나눈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좋고 싫음, 높고 낮음, 곱고 미움으로 나누다 보니 온전한 앎을 얻기가 어렵다. 이들은 인간의 얕은 생각일 뿐, 본래 하나임을 우리는 안다. 허상을 향한 집착이 고통을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기 안에 스스로 진리와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처럼 , 우리는 지혜의 눈으로 진실을 볼 수가 있다. 진실한 눈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발로키테스바라

avalokitesvara

See as it is

있는 그대로를 보라


지혜의 눈으로 보면 스스로 바른 답과 광명 세계를 얻을 수가 있다는 말씀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것'은 누구나 알 수가 있는 공통의 언어이다. 이 공통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익숙한  2분법의 세계로 쉽게 이끄는 이 마음의 역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림/ 티베트 불교 lamaism에서 유래한 '옴마니 반메훔' 진언. 관세음보살의 가호를 비는 만트라(주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진리로 인도하는 '관세음'은 자기 안에 이미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우리를 익숙한  2분법의 세계로 쉽게 이끄는 이 마음의 역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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