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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Jun 05. 2023

Why와 What의 역사  21. 신화에서 과학으로

Why와 What의 역사
문명의 진화
21. 신화에서 과학으로

신화에서 과학으로, 이것은 여전한 진행형이다. 신화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신화에서 과학으로의 진화는 기록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진실은 입증되어 기록으로 남겨지고 축적된다. 이것이 과학의 발전 과정이다. 과학적 발견들은 진리의 주춧돌이 되고 기둥이 되어 다음 세대로 넘겨진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입증되지 않은 신화들이 아직도 멀쩡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역설적이지만, 이들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지 않을까?

이념에서 합리로
이념은 시대적 요구의 산물이다. 때로 '시대정신'이라고 말하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진리로 나아가기 위한 균형 잡힌 노력이 요청된다. 치우치지 않는 합리적 균형은 이치 타당한 보편성을 가지게 한다.
인간사회를 분열시키고 갈등을 만드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종교 간의 반목과 배타성이다. 상대를 인정할 수가 없으니 그 자체가  불화와 분열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모든 종교는 진리를 추구하며 믿으려는 열망을 가진다. 자연원리는 공통의 진리이므로 공통된 신의 섭리라 할 수도 있다. 이것을 탐구한 자연 과학적 진리는 신의 계시와도 같다. 인간은 앞으로도 신의 계시를 얻어 앞 길을 밝혀 나아가야 할 운명이다. 신의 계시와 종교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탐구해야 하는 과업이다. 자연 과학적 원리들은 이것을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도울 것이다.

자연과학은 진리의 언어 체계다. 이것은 진리를 구하는 모든 종교가 갖추어야 할 공통의 언어이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인류는 본래대로 하나가 될  수가 있다.
 자연과학은  피할 수가 없이 문명과 역사의 방향이 되고 있다. 오늘날의 디지털 정보통신 혁명은 누구나 가진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다. 인공지능은 공동의 거대 언어 체계를 바탕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들이 할 일 중 가장의 의미가 있는 일은 지금의 AI의 발전처럼 공동의 '거대 언어 모델 LLM'을 공유하며 종교 간의 상호 이해와 관용의 세계를 열어가는 일이다.



신화의 극복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말해지지만 이타적인 본능을 함께 가진다. 사람에 따라 그 정도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대개 부정적이고 이분법적 성향을 가지며, 이타적인 사람은  긍정적이고 관용적인 성향을 지닌다. 이기적이고 부정인 성향은 바로 이분법적 사고의 결과임을 알 수가 있다. 이분법적 사고는 자신에게도 늘 불편을 준다. 그럼에도 이것을 쉽게 떨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분법적 사고는 고정관념에 묶인 경직성을 지닌다. 세상과 자기 마음의 흐름은 늘 변화하고 있는 데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이것을 유연하게 따라잡을 수가 없다. 이 경직된 인식 구조는 자기도 모르게 한쪽으로 자신을 내 몰며 집착과 강박을 만들게 된다. 대체 이 이분법의 정체는 무엇일까?
신화는 가상의 세계이다. 순수하고 소박한 인식이 펼치는 상상과 욕망의 세계이다. 그래서 신화는 본능에 가깝다.

권력은 대개 이 '순수'를 이용하려 한다. 이것은 권력의 오랜 속성이자 역사이다. 권력은 태생적으로 불순한 존재다. 불순한 의도로 남을 설득하고자 하니 합리적 방법으로는 성공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동원하는 것이 거짓과 물리적 강제였다.
신화는 이런 권력에 의해 변질되고 왜곡된다. 신화의 왜곡은 의식의 왜곡을 낳았다. 이것은 권력의 음모이다.
그들은 대중에게 의도된 '두려움'을 심고 그들이 가진 '본원적 두려움'을 자극한다. 권력은 이를 이용해 대중을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게 된다. 이것이 소수의 권력인 절대다수를 분열시키며 지배하는 전통적 방법이다. 인간 세계를 지배하는 이분법은 이렇게 탄생한다. 이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인간은 이로부터 자유를 되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분법에서 자연원리로
이분법은 부분적이고 편협하다. 그래서 논리적 약점을 가진다. 본래부터 중요한 무엇을 왜곡하거나 감춘 모순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전한 전체를 반영하지 못한다. 다각도로 검토하면 허점은 쉽게 드러난다. 이것은 결국 좋고 싫음의 허상에 너무 이끌려서 생겨난다. 그러나 본래 이것은 하나로 있는 것이다.
진리는 온전한 입체로 있다. 자연원리 또한 여러 진리(법칙)들의 입체적 구성이다. 입체적 구조이므로 변화를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는 탄력성을 가진다. 부분적이며 모순된 이분법을 떠나 자연원리를 적극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본연의 자유 세계를 되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과학 science이 가지는  인류사적인 소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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