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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Jan 02. 2023

왜 과학인가? 과학이라는 도구

메타인문학 02

#메타인문학


왜 과학인가? 과학이라는 도구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한다. 선택의 순간에 선 우리는 우리의 앎이 부분적임을 실감한다. 우리에게는 눈앞의 나무를 보는 지혜와 함께 전체인 숲을 조망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우리는 숲과 같은 전체로부터 균형된 앎을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눈앞의 나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아는 만큼만 볼 수가 있고, 볼 수 있는 것만큼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의 ‘양면적 딜레마’는 우리를 어려운 오해나 무지 가운데 머물게 한다.

이러한 ‘양면적 딜레마’를 깨뜨리고 생각에 자유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은 상상력이다. 생각에 상상력의 날개를 다는 일이다. 그러나 날개는 자유를 선물하지만 비능률과 위험도 같이 준다. 과학은 합리적인 상상력이다. 그래서 기존 관념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자유가 가진 비능률과 위험을 줄일 수가 있다. 과학을 새로운 정보화 시대에 자유를 위한 유용한 도구로 쓰자는 것이다.

인문학은 지금까지 다른 학문에 비해 뚜렷한 발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다 합리적인 개념을 통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전기를 맞고 있다. 자칫 이러한 주장은 과학 만능주의로 비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인간 고유의 영역로 여기고 있는 인문학에까지 과학적 도구를 사용하게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마땅히 있다. 또 합리주의라는 획일적 잣대로 인간성을 재단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의 드높은 정신세계인 예술과 창의의 영역을 침해할 것이라는 우려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종교적 세계관에 대한 도전으로도 오해될 수가 있다.


그림/ 길가에서, 박수근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일원이며 인간 사회도 자연 현상의 일부라고 이해한다면, 자연과학적 개념과 원리는 인간과 인간 사회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문학과는 운명적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지금까지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서로 이질적으로 느껴진 것은 각기 다른 공간에서 발전되어 온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풍부하게 발달 된 자연과학적 개념과 방법론은 답보 중인 인문학의 발전에도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기반으로 발전한 경제학과 사회학 등의 성과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이 글의 바탕인 ‘자연주의 naturalism’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주의는 자연원리와 같은 보편적 원리를 따르는 ‘과학적 합리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과 과학의 차이
앞서 말했듯이 인문학과 과학의 차이는 ‘언어’의 차이다. 우리는 언어적 개념으로 생각하고 소통하지만, 언어는 불완전한 그릇이다. 오해와 불신의 여지를 늘 안고 있다. 또 언어의 이런 허점을 이용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가짜뉴스가 홍수를 이루는 현상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 정치는 거짓의 기술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상식이 되어 있다. '참과 거짓'의 구분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언어의 문제다. 우리의 언어를 보다 명료한 과학의 언어로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학의 언어는 명백하며 검증 가능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대적 언어가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이라면 머리를 싸맨다. 이런 선입관을 버리고 장점을 이용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다행히 과학적 용어와 개념은 이미 대중화되고 보편화 되는 추세다. 알고 보면 쉽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라 할 수가 있다.



막스베버Max Weber(1864~1920년) 자연 과학적 방법을 사회 과학에 적용,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주창하며 근현대 사회 과학의 초석을 놓았다. 인문 과학에도 활용 하여 모호한 인문학적 개념을 명확히 업그레드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앎의 패러다임 변화
정보화는 모두에게 지식과 정보의 홍수를 선물한다. 이것은 지금처럼 ‘정보’ 중심의 앎이 아니라, ‘원리’ 중심의 앎를 요구한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을 통한 세계이해가 아니라 ‘원리’를 통한 세계이해다. 따라서 과학의 언어와 친해지는 것은 점점 유리한 상황이 되고 있다. 이것은 원리를 함께 읽으며 정보를 수용하는 방식이어서 효율적이다. 요즘 주목받는 학습법인 ’메타인지 metacognition‘와 유사하다. 대상을 입체적이고 원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전체를 균형 있게 인식하여 편견을 줄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생 동안 ’편견‘으로 인해 두고두고 비용을 지불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제 일상의 생활에서도 보다 진보된 앎의 방법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앎의 방식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의도적이고 명확히 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원리적 앎‘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데도 매우 유용하다. 늘 검증을 거치는 앎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나 지레짐작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관찰-가설-검증‘의 과정을 거쳐서 얻는 명료하며 튼튼한 앎이다. 이것은 남의 앎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얻은 앎이다. 처음엔 어려워 보이지만 익숙해지면 이것만큼 편하고 명확한 앎의 방식이 없을 것이다. 아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학문적으로 ’과학적 방법‘ 또는 ’귀납법‘으로 불린다. 오늘날의 자연과학과 첨단기술의 놀라운 성과는 모두 이 간단한 원리에 기초한다. 이것을 생활 가운데 적극 활용하자는 이야기다. 우리의 앎을 합리적이며 명확학 언어로 업그레드하기 위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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