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그 뜨거웠던 여름

…..섬소년의첫 사랑

by 홍이

1984년의 거제도 바닷가는 지금보다도 더 푸르고 맑았다. 햇빛이 비치면 바다 위는 금빛으로 반짝였고, 물 아래로는 푸른 빛깔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마치 끝없이 깊고 넓은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 같았다. 그런 바닷빛 아래서 우리는 여름을 보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고, 모든 것이 단출했다.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때로는 운동장보다 더 넓은 바다로 뛰어나가 물속에서 놀았다. 그때의 바다는 우리의 놀이터이자 생명이었다. 물안경 하나 없이도 맑은 물 아래를 들여다볼 수 있었고, 가리비와 성게, 해삼 같은 바다의 먹을거리는 그저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었다. 여름이면 몸에 염분이 베일 정도로 매일같이 바다에서 놀았다.


하지만 그 여름은 조금 달랐다. 아저씨의 아들과 딸이 부산에서 내려온다는 소식이 우리 가족에게 전해졌을 때, 나는 그저 신기하다는 생각뿐이었다. 특히 그 딸아이를 처음 봤을 때, 내 마음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느꼈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 햇빛 아래 뽀얗게 빛나는 얼굴, 부끄러워하면서도 웃을 때의 그 표정까지. 누군가를 이렇게 마음에 담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형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형은 평소에도 공부 잘하고 점잖았지만, 그 소녀 앞에서는 괜히 다정한 척하고, 내게는 관심도 없던 바다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이 조금 얄미웠다. 형과 나는 그 애를 두고 마음속으로 묘한 경쟁을 시작했지만, 말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 소녀는 바닷가와는 조금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도시에서 왔다지만 시골 아이들처럼 꾸밈없고 수수했지만,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낯설었다. 숙제를 열심히 하고, 책을 읽고, 틈만 나면 피아노를 쳤다. 내가 모르는 단편 소설을 읽곤 했는데,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에 대해 들려줄 때의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녀가 한 번은 들려준 소설 속 이야기였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여름날의 비밀스러운 모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우리가 그 소설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바닷속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맨발로 바위에 올라 성게를 따는 법, 해삼을 잡는 법을 알려주며, 그녀가 좋아하던 피아노 소리 대신 파도와 바람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바다에서 노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신기했다. 평소의 얌전함과는 다르게 물속에서 첨벙거리며 웃고, 해삼을 처음 잡아 올리며 깔깔거리던 소리는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우리 둘은 점점 더 가까워졌고, 그녀의 동그랗고 빛나던 눈은 늘 나를 웃게 했다. 그녀가 내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던 순간은, 어느 날 우리가 함께 ‘우묵’을 만들었을 때였다. 우뭇가사리를 바다에서 떠내어 맑은 물로 씻고, 바닷바람에 살짝 말려 만든 우묵은 투명한 젤리 같았다. 그녀는 그걸 보며 “마치 투명한 바다 한 조각 같아!“라며 기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이 여름이 평생 내 기억 속에 남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나는 축구부 기숙사로 떠나야 했고, 그녀도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지막 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바닷가를 걸으며 함께 본 쏟아지던 별, 이웃교회 부흥회에 가며 동네 아이들과 웃고 떠들던 기억들이 마치 내 머릿속에 고정된 듯 선명했다.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녀도 나처럼 이 여름을 잊지 못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첫 배를 탔다. 푸른 바다 위를 떠나는 배에서 문득 돌아본 거제도의 해안선은 그 여름의 끝을 알리는 신호 같았다.


1984년의 그 여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짧고도 깊었던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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