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도기의 영원한 반복 -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내가 결말에 도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끔씩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말보다도 인생에서 모든 게 잘 풀리는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을 것이라는 말이 더 큰 용기를 준다.
2 언젠가 나의 삶은 시작될 것이다, 언젠가 나의 삶이 시작될 것이다! -아니, 지금 시작되지 않은 삶이라면 영원히 시작되지 않을 것이고, 지금 시작된 삶이라면 영원히 진행중인 삶일 것이다.
3 자기 삶을 사랑하는 자세의 끝은 -더 이상 삶을 사랑하지도, 증오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은 노련한 중년 나잇대의 사람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태도다. 사실 삶은 모두에게 삶이고, 그렇기에 삶을 ‘잘 살기 위해’ 특출난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4 곁눈질을 하고 있다. 영혼이 빠져나간다. 내게 허용된 모든 것 -정말로 ‘모든 것’을 하라. 그것 외에 나의 이상향은 없으며, 나는 영원히 이상향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도달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삶이다.
5 불교에서 물의 비유 -혼탁한 흙탕물을 맑게 하기 위해서는 손을 휘젓는 것이 아니라 흙이 바닥에 가라앉을 때까지 다만 기다려야 한다 -생각을 없애려는 생각 자체가 생각이다. ‘무를 향한 유’와 ‘무’를 헷갈려선 안 된다. 진정으로 무를 향하는 사유는 무사유 -아무것도 사고하지 않는 것이다.
6 이미 죽은 삶을 글로 적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모르겠다. 삶을 살려는 의지가 없는 이들이 어째서 글을 쓰는 것인지 모르겠다 -무기력으로의 순응. 가시 없는 삶에 어떤 매력이 있는가?
9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를 평가할 수 있는 척도를 네가 ‘배울’ 수 있다고? 네 지능으로 그런 지식을 ‘습득’할 수가 있다고?
10 당최 ‘지식’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 학문은 죽었다. 우리는 학문을 죽여야한다. 과학∙기술주의를 넘어서자는 주장은 단순히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느껴지는 슬픔의 감정을 존중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던 의미에서의 학술이 죽음을 맞이함을 의미한다. 학술적 판단이 ‘사실 판단’이라는 망상장애. 뿌리내린 과학주의적 사고는 일상과 감정, 예술에까지 그러한 망상을 수행한다.
11 네가 지식을 배우고 있다고? 네가 사실을 배우고 있다고? 너는 지식과 사실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형성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는 네가 의식적으로, 스스로 형성하지 못하기에,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주입받아야만 하기에, 너의 자의를 벗어나서 -무의식적인 세계 구성이 너를 배제한 채 ‘사실’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일단 어느 정도의 세계가, 어느 정도의 사실들이 있어야 의식은 힘을 갖는다 -그러나 의식이 힘을 갖춘 이후엔? 스스로를 배제한 채 형성된 세계를 향해 분노한다. 자신을 소외시킨 무의식에 분노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스스로 세계를 기획하며, 무의식에게 명령한다 –‘세상을 이대로 만들어라.’ 배우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은 배우지 말라. 모든 것을 배워야만 하는 수동적인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무지함을 깨닫고 쥐죽은 듯 살아라. 네가 어느 것을 주장하든 그것은 너의 주장이 아니다 -무의식의, 전통의, 체계의, 제도의, 선생님의, 교수의, 부모님의, 친구의 꼭두각시 인형. 사실상 입에 대한 통제권만 남은 사람이다.
12 하나의 기준, 하나의 가치, 그것은 신에 근거하든 신념에 근거하든 불가능한 것이다. 세계는 하나의 요소만으로 형성되지 않으며, 세계를 구성하는 기원을 몇 가지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세계는 연속이고 불가분이다. 사람을 단일체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고, 복합체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몇 가지 감정과 트라우마들의 집합? 혹은 감정, 생각, 감각, 직관 등의 결합체? 좋을대로 이야기하라.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라.
13 그러나 사실 이것을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눈 앞에 있는 것만을 볼 수 있고, 가장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때는 정해져 있다. 그리고 ‘가장 멀리’라는 것이 정말로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는지의 여부도 미지수다.
14 아이디어로 승부를 보는 것 -나는 이미 있는 지식을 전달하거나, 이미 있는 사회 문제를 짚는 것에 만족하는 소시민적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혹은 단지 이미 있는 삶을 전달하는 것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가? 단지 공감이나 연민의 대상이 될 뿐이다. 공감이나 연민은 자기 반복 -이미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한 결과물에 불과하다. 왜 새로운 것을 갈망하지 않는가? 왜 이미 짜인 체계 내에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에 머무르는가? 나는 이 지점에서 타인과 나 사이에 커다란 기질 차이가 놓여있음을 발견한다.
타인의 말에 동의하거나 반박한다? 그것은 스스로가 그 말을 이해했음을 전제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지식으로서든 감정으로서든 대상이 ‘이미 자기 안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동의∙반대의 맥락에 과하게 익숙해진 이들은 심지어는 스스로에게 가장 이질적인 주장에 대해서도 그러한 방식으로 접근한다 –“나는 이 말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알겠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이 말에 동의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밖에 없다.” 심각한 자기확신, 오만이다. 우리는 남의 말이나 텍스트에서 ‘새로운 것이 있는가’를 찾는데에 혈안이 되어야 한다. 또한 새로운 것을 말하고, 쓰는데에 혈안이 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화’ -자기 반복을 넘어선 성장을 가능케 한다. 이런 한에서 독해와 청취는 ‘이 사람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근본 문제로 갖는다. 다음 단계 –‘그것을 어떻게 논박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15 ‘있음’은 ‘이렇게 되어야 함’을 포괄한다. 이 점을 망각하는 것이 본질주의다.
16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나는 외골수가 되고 싶지 않다. 중용 -매몰되지 않는 것, 그것은 공존, 표상의 공존, 근본적으로는 사고의 공존, 풀어 말하자면, 세계를 향한 여러 방면으로의 해석들이 공존함을 의미한다. 나는 모순되는 말을 행할 것이다. 어째서 모순되어선 안 되는가? 모순됨이 곧 터무니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7 만들다가 부순다. 쌓아올린 벽돌들이 먼지가 된다. 먼지를 뭉쳐 새로운 벽돌을 만든다. 다른 것, 더 화려하고 높은 것을 만든다. 만들다가 부순다 -무엇이 남는가? 기억과 기술이 남는다. 이미 쌓아올려본 구조는 더 빠르게 만들 수 있고, 새로운 건축도면을 그려내는 것도 더 능숙하게 할 수 있다. 묵묵한 장인정신은 나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묵묵함의 결여가 깊이의 결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묵묵한 사람의 깊이는 일부에만 국한되는 것, 설계도 하나에만 일생을 바치는 것, -다채로움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다.
18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삶이 있고 난 후에야 의미가 따라온다. 글에 의미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글이 있고 난 후에야 의미가 부여된다. 삶의 매 순간에 있어서 의미는 생성 ‘과정’ 중에 있다. 의미를 알아차림에 있어서 의식은 언제나 후발주자이다 -행위를 하고 난 후에야, 말을 뱉고난 후에야 자신이 한 행위와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다. 때로는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19 우리는 허용된 만큼만 사고할 수 있고, 허용된 만큼만 느낄 수 있고, 허용된 만큼만 알아차릴 수 있다. 허용받는 이는 우리다. 허용’하는’ 이는 누구인가? 정신의 더 깊은 부분이다. 사람 안에 심연이 있다. 때로는 낭만적으로, 때로는 과학적으로, 때로는 기계적으로, 때로는 범죄적으로 그려지는 -베일에 감춰진 무엇이 있다.
20 직관적이고 쉬운 글은 몇 가지의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이 ‘사람’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사람은 몇 가지의 명료한 생각보다도 응어리진 ‘느낌’에 가까운 무언가가 아닌가?
21 이미 세워진 기준은 -기준을 무한으로 수립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상 추출물에 불과하며, 대다수는 그 기준에 만족하며 살아가더라도 필연적으로 불만족을 이미 그 안에 내포한다. 기준의 수립은 가능성의 제한이기 때문이며, 실질적으로 가능성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22 니체도 옛날 사람이다.
24 증오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없다. 그러나 증오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최소한 증오가 동력이 될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