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메타타 07화

맨삶

불필요한 겉껍질을 벗겨라

by 백오


7 모든 생각의 본질은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 그 자체로서의 생각’, 이것 외에는 생각이 가질 수 있는 고정된 의미나 근거는 없다. 옳고 그르고를 뭐하러 논하는가? 토론은 이질성을 접하기 위한 활동이지 설득을 위한 활동이 아니다. 토론의 본질은 ‘말싸움’ 자체에 있지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에 동화되는 것에 있지 않다. 다만 감정적, 지적인 동요를 통해서 토론 당사자들의 세계가 자연스레 ‘융합될’ 뿐이다. 누가 누구에게 ‘영향받는’ 과정은 논리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몇몇 인상적인 제언이 듣는 이의 무의식 속에 침투해 들어갈 뿐이다.



8 우리는 정신 전체에서 의식이 갖는 위치를 다시 평가해야한다. 인공지능은 완전한 무의식적 작동만으로 인간 정신의 상당 부분을 모사한다. 사실상 의식은 아무것도 아니다. 정신의 모든 신비로운 점은 입력값에 대하여 출력값을 내놓기 위한 내부 회로 -우리가 자주 의식하지 못하는, 오히려 취침할 때 가장 활발해지는 그 작용에 있다. 고로 사실상 의식이 해야할 것은 질적으로 양적으로 가능한 한 뛰어난 입력값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두뇌에 재료를 주입하는 것까지가 우리가 할 일이지 그 재료를 이해하거나 활용하는 것은 언제나 무의식의 몫이다. 학습과 창작 과정에서, 의식은 자주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여 월권을 행사하려한다. 그것은 불행의 단초이다. 생명체가 기계 -스스로 활동하고, 스스로 에너지를 보충하는 자동기계가 아니면 무엇인가? 삶을 살아가는 매순간 우리는 기계의 작동 과정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기계를 관찰하는 것까지가 기계의 작동 내용이다.



9 동일한 인풋을 입력받았음에도, 질적으로 양적으로 남들과는 전혀 다른 아웃풋을 출력해내는 사람이 정신적 능력에 있어서 ‘천재’의 정의이다. 기계 내부의 메커니즘이 타인에 비해 몹시 복잡하여 산출해내는 내용에 거대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은 의식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꾸역꾸역 공부하지 않는다. 지식에 대한 이해와 암기 내용은 출력값, 곧 이것과 저것을 기억하여 연결해낸 산물이다. 출력값을 산출해내는 능력이 뛰어난 기계라면 -훨씬 적은 입력만으로도 충분한 결과를 낼 수 있다.



10 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 아닐까? 우리는 학문, 사회, 정치, 역사, 예술 등등 저마다의 값을 저마다의 삶의 궤적 속에서 입력받았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입력된 값들을 처리하는 -사고의 과정에서 여러 재료들을 엮어 출력값이 산출되며, 그 출력값이 출력과 동시에 정신에 입력되어 재료로써 사용되는 무한 순환, 자기 피드백 과정. 이 피드백을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진행하였느냐의 산물이 지금 우리가 하는 이야기, 쓰는 글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삶이 진행됨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어나갈 것이다. 고로 특정 시점에 쓰인 글은 변화를 본질로 하는 기계의 단면을 잘라서 고정시켜놓은 스냅샷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글 하나하나를 한 편의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특정 시점의 삶을 고정시켜놓은 사료, 화석, ‘흔적’으로 보아야만한다. 글의 본질은 흔적을 남기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더는 내가 아닌 글,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글은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음에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물길과 같다. 그런 한에서 가치를 갖는다.



11 물론 모든 글이 탁월하지는 않다. 모든 기계가 우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생체기계가 금속기계와 다른 점은 -구식이 되어도 폐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글의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는, 글 자체의 문체나 공감 가능성보다도, 이 글에 ‘저자가 자신만의 입력값을 받아서, 자신만의 출력값을 내놓는 과정’, 그러니까 다른 기계와는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잘 묻어나오느냐에 있어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사실 글의 가치와 사람의 가치는 동일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기준이다. 그러나 당신에게도 큰 도움이 될 기준이다. 익숙한 글은 당신이 이미 갖고있는 것과 비슷비슷한 재료만을 제공할 것이다. 내 생각에 글을 읽는 경험은 그것이 문학이든 에세이든 독자에게 성장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어야하며, 최선의 성장은 최선의 이질감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사실 자본주의자는 성장하기 위해서 마르크스주의를 배워야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타인에게 수준 높은 이질감을 제공할 수 있는 글이 곧 좋은 글이다.



12 우월 추구의 욕망과 자유의 욕망 -스스로 몸 담아 성장할 기준, 척도 하나를 세운다. 잠시 그것을 따르다가, 옥죄임을 예방하기 위해 이내 그것을 무너뜨린다. 그리고는 머지 않아 이전 것과 유사한 기준 하나를 다시 세운다. 이것은 기계가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 -이미 선점한 땅을 무의미하게 파고 내려가는 고집스러운 삽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과정이다. 두 이질적인 욕망은 서로를 공격하여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패배한다. 이를 통해서 전체 정신이 운동한다.



13 맨삶 – 삶이 이렇게 있도록 된 바 전체. 가장 끝에서의 사유 -무사유. 처음에 사람의 초점은 머릿속에 맞춰져있다. 이후 머릿속에 폭발을 일으켜 내부의 구조물을 모조리 깨부순 정신은 이제 눈 앞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마침내 모든 투명함을 자기 안에 체화한 사람은, 투쟁을 멈추고 머릿속과 눈 앞 사이의 이분법을 지양하여 모든 것을 ‘눈 앞’으로 만든다.

1단계 – 세계는 자본의 논리, 혹은 신의 윤리로 작동하며, 오로지 그것만이 진실이다. 고로 최대한 많은 돈을 벌거나, 가능한 한 독실하게 신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삶이다. -이 단계에서는 ‘관념의 절대성’이 당연히 전제된다.

2단계 – 자본과 신은 인간의 근원적 삶이 먼저 있고 난 후에 ‘만들어지는’ 가상일 뿐이다. 그러한 독선적 관념 몇 가지에 삶이 침몰되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눈 앞에 있는 것, 정말 내게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의 집합만이 참된 세계다. -여기서 ‘관념의 상대성’이 최초로 조명된다.

3단계 – 사람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이런저런 사고를 하고,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관념에 침잠하여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버릇이 있다. 그 전체가 ‘눈 앞에 있는 것’, 곧 세계의 참된 모습이다. 이 관점에서는 ‘거짓된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참된’이라는 말도 불필요하다. 고로 ‘참된 세계’, ‘거짓된 세계’가 아니라, 오로지 ‘세계’만이 있다. 세계의 어느 부분도 거짓되지 않고 참되지 않다. -최종적으로 ‘관념의 절대성과 상대성’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부정되며, 오로지 ‘관념’ 그 자체만이 남는다. 그 자체만을 위한 활동, 전적으로 무의미하지만,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그냥 행하는 활동, 근본적인 차원에서 진지하지 않은 것임을 알면서도, 생사를 가르는 진지한 일인 양 최선을 다하는 활동 -그것은 놀이이다. 이제 사람은 삶의 목적을 상실하지 않는다. 싫증이 나서 다른 장난감을 찾아나설 뿐이다.



14 본질이 없는 것이 글의 본질이라고 하면 글에는 본질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그러나 글의 본질이 있고 없고는 글의 본질이 아니다.



15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만 바라볼 수 있다. 파악할 수 있는 함의까지만 파악할 수 있다. 자신이 배우거나 사유한 내용으로부터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수준까지만 이해할 수 있다. 갇혀 살지 말라. 본인이 한계지을 수 있는 데까지만 한계지어라. 당신의 협소한 목장을 뛰어넘는 들판을 만났을 때 -최소한 무언가가 저 멀리에 있음을 알아차리는 사람만이 들판의 일부라도 품을 수 있다. 몇몇 청년들은 벌써부터 중년스러운 설교의 자세를 내보인다. 중년들은 이미 자신의 한계 끝까지 도달하여 내리막길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의 여유 속에 감춰진 자격지심 -자신보다 젊고 화려한 청년들의 삶에 테두리를 두르고자 하는 마음, 특히 자식뻘에 동성인 사람에게 더 커지는 그 감정은 (중년에게는 내리막길을 걷는 불행을 피할 길이 없기에)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청년이 이미 자신의 한계에 도달한 듯이 또래에게 연장자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큰 문제다. 스스로의 협소함을 깨닫지 채로 중년이 되면, 정말로 아무 것도 되지 못할 것이다.



16 ‘수정’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다. 수정은 다시금 창작이 아닌가? 그렇다면 수정을 위해서는 수정을 또다시 수정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또, 수정하기 전과 수정한 후의 내용이 정확히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면, 그렇다고 수정이 내용 이해에 엄청난 도움을 준 것도 아니라면, 뭐하러 편집을 하는 것인가? 단지 ‘깔끔하게 만들기 위해’, ‘완벽한 작품’으로 박제시켜 놓기 위해 자신의 흐름을 고쳐놓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당최 깔끔함과 완벽함의 기준이 무엇인가? 또, 왜 깔끔해야 하고 왜 완벽해야 하는가?


나는 여기서 ‘퇴고를 위한 퇴고’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써야하는가’의 작문론은 ‘어떻게 읽어야하는가’의 독해론과 뗄레야 뗄 수가 없다. 우리는 글을 읽을 때 언제나 검은 잉크 표면의 배후에 -심연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문장은 오로지 포장으로서만 그 가치를 갖는다. 작가는 심연을 쓰고, 독자는 심연을 읽는다 -이것이 나의 이상이다. 자기 안에 심연이 있음을 모르는 자 -그런 이들이 바로 시체인 것이다.



17 이디야는 아이스티가 맛있다.



18 개혁과 진보를 향한 모든 이상은 허구다. 모든 것은 처절하게 맴돌 것이다. 다만 우리의 삶의 시간 속에서 원형의 와류 속 아주 작은 물줄기가 앞으로 향할 뿐이다.



19 세상에 진정으로 의미있는 것은 없다 -의미의 의미는 무의미다. 그러나 사람은 그 본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의미를 찾는다 -사람이 곧 세계일 때, 세계 안에는 반드시, 무의식의 필연적인 기전에 의해 의미가 놓인다. 그러므로 의식은 의미를 찾아헤맬 필요가 없다. 일단 살면, 세계는 존재하며, 세계가 존재하면, 의미는 저절로 생성된다. -의미 또한 기계의 작동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산물이기에.



20 편협함은 세계의 좁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세계의 얕음을 의미한다. 글쓰기나 배움이 ‘사람’의 활동이라면, 우선 ‘무엇이 좋은 글인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를 논하기 전에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논해야함은 자명하다. 그리고 바로 그 존재론적인 물음에 논의의 ‘근원’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존재론을 논한 이후에 그것을 토대로 작문관이나 교육관을 이야기하면 편협한 외골수들은 그 중에서 자신의 관심 분야만 취사하여 읽을 뿐 진정 중요한 존재론에 관한 부분 -그 근원적 논의는 전혀 읽지 못한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그런 이들은 얼굴을 옅게 찡그리며 다음 세 문장 중에 하나를 말한다 ‘너무 극단적인 주장이다’, ‘너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다’, ‘존재론 같은 거 신경 안 써도 인생 사는데에 아무 지장 없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는 ‘편협함’은 관심 영역이나 지식의 크기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 -무언가 ‘튀어나가는 느낌’, ‘돌출되는 느낌’, ‘찔리는 느낌’에 호기심을 느끼느냐, 불편함을 느끼느냐의 차이에 따라 갈라진다. 고로 사실 관심 영역이나 지식의 협소함은 이 ‘편협함’의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예술은 작품이 아니라 삶의 자세이다. 가시로 세상의 테두리를 찔려 기다란 균열을 만들어내고, 그를 통해 세계 -곧, 자아를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아집으로서의 극단성과 유희로서의 극단성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생소한 이야기에 일단 마음을 닫고 보는 이들은 예술가로서의 색채가 결여된 이들이므로 최소한 작가(내 생각에는 명백한 예술가 집단인 것)로서는 나눌 이야기가 별로 없다. 사실 사람이 곧 세계이며, 세계의 크기가 곧 사람의 크기를 지시하므로, 사람으로서도 나눌 이야기가 크게 없다. 현대보다도 전근대에 적합한 인간상이다.



21 교육적으로 -한국은 (교육받을 기회에 있어서) 학생들 간 지식의 편차가 적지만 태도의 편차가 심하다. 이전 세대의 정신적 빈부격차로 인해 누군가는 세계를 닭장으로 보고 누군가는 세계를 빈 지도로 본다. 닭장의 세계관에서 인간의 역할은 주어진 모이를 충실히 먹고 낳아야 하는 알을 성실히, 혹은 성실히를 넘어 치열하게 낳는 것이다. 거기에는 경제적 빈곤 속에서 빈자가 느끼는 결핍감과 열등감, 삶에 대한 (이제는) 과도한 진지함이 서려있다. 빈 지도의 세계관에서 인간의 역할은 배를 타고 출항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알려줄 수 없고, 가르쳐줄 수 없는 미지를 향하여 -이것은 ‘여유가 있는 사람들’, ‘실패해도 뒤가 있는’ 부유층 특유의 여유 서린 태도이다.


‘교육열’이라는 말은 부모가 자녀에게 전달하는 ‘지식’에 관한 내용만을 문제시 한다. 그로부터 전인은 죽고 돈과 학벌, 직업만이 남았다. 비관주의 혹은 욜로는 전인의 죽음에 대항하는 나름의 해결책이나, 몹시 미성숙한 해결책이다 -그런 것을 추구하는 이들은 아마 ‘전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지식을 위하여 삶의 자세 –‘모범생의 이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세를 위하여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 당최 입시와 수능이 우리의 인생에 관하여 어떤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는가? 그것은 톱니바퀴를 길러내는 방식일 뿐이며, 낡은 톱니바퀴는 교체되어야만 한다. 삶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를 위한 삶 -그것은 죽음 혹은 살해와 동의어다. 이 기괴한 전도로부터 전인을 구출해낼=전인을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삶을 가르침에 있어서 부모에게 아이를 맡겨선 안 된다. 우리는 많은 부모의 자녀 양육 능력이 수준미달이라는 사실을 -현명한 부모를 만나는 것은 꽤나 드문 행운이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람에게 사람을 맡기기엔 사람은 정서적으로 몹시 취약한 존재이며, 스스로가 지닌 결핍으로 하여 부적절한 선택을 과도하게 많이 한다. 그러므로 개개인이 아닌 시스템에 맡겨야 한다 -학교에서 수학, 과학보다도 철학을 -능력으로서의 철학을, 삶의 자세로서의 철학을, 예술로서의 철학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어려울 것 없이, 스스로가 자신의 이론을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을 가지고 타인과 논할 수 있다는 사실, 그를 통해 원래 알던 것을 무너뜨리고 삶의 탑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삶의 기본적인 조건들을 체화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이 체화에 있어서는 타인의 캔슬이 없지만 논의는 있는, 어느 정도 고립되고 또 어느 정도는 개방된 환경에서 주기적으로 에세이를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렁물렁한 출발선에 있어서,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은 정말로 한 끗차이인 것이다. 글을 씀에 있어서 아이들에게 강조해야 할 것은 질이 아닌 양이다 -질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그 자체로 캔슬이다. 다른 한편 질이란 양이 많으면 자연스레 따라나오는 것 -양에 ‘종속된’ 것이다. 고민과 불안, 두려움이 해결해주는 것은 거의 없음에도 성과주의적 교육은 눈 앞의 성적을 위해 그러한 것을 부추기려 한다.


솔직한 말로, 국가가 기울어가는 향후 수십 년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 세대 중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인재가 발견될까? 이전 세대에게는 최소한 빈곤, 구타, 독재, 차별 등의 혹독한 환경이 실제로 주어져 있었고, 그 속에서 독기를 품고 능력을 쌓은 개인들이 배양될 수 있었다. 그들은 시스템 아래에 복종한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행동함으로써 우리가 지금 복종하고 있는 그 시스템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반면 우리는 모순 속에, 과도기 속에 서있다. 기존 시스템에 서서히 균열이 가해지고, 다음 시스템이 서서히 확립되는, 그 과정 속 초기 중의 극초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 완전한 결핍은 출발점이고 완전한 충족은 목적지다. 그 사이 어딘가, 절반 정도의 결핍, 절반 정도의 충족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는 무수한 지점 중에 하나일 뿐이다. 우리 세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변변찮은 세대로 기억될 것이다. 기대를 걸어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이 아니라 미래의 삶이며, 우리는 스스로가 보잘 것 없는 사람임을 -중책을 맡을 능력도, 태도도 되지 않는 이들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가져야 할 사명은 이것이다 –‘아이들이 나처럼 살도록 두어선 안 된다.’ 스스로가 자기 삶의 주인공이라는 오만과 월권을 거두고 징검다리로서 소멸하는 주변인적 삶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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