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메타타 09화

사유노트

내면록

by 백오


이유를 알 수 없는 권태감과 불안감이 밀려올 때면 어떤 글을 읽어도 짜증만 날 뿐이고, 어떤 글을 쓰려 해도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

무턱대고 지하철을 타고 서점을 찾는다. '진짜 글'을 보고 싶었다. 내 마음을 완전히 동하게 하는 그러한 책. 어째서 그런 글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주변 사람들과 저자들에게 이렇게 짜증이 나고 권태스러운 것일까? '이렇게 쓸거면 뭐하러 글을 쓰는거지?' 하는 생각을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을까? 내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해결책일까, 아니면 정말로 나에게 맞는 글이 따로 있는 것일까?



6호선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서는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는 유리창을 바라본다. 옅게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나의 감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나의 감성을 존중해주지 않는다.

내게도 나의 삶이 있다. 내게도 나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내게 '진짜'로 보이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글을 쓰는 법'이라는 말은 '깊은 내면을 형성하는 법'과 동일한 말이다. 형식이 어떻고 작법이 어떻고 하는 말은 부차적인 문제다. 내용에 깊이가 없으면 글이 아무리 화려하고 세련되어도 무슨 소용인가? 아무리 완성도가 높아도 '가짜 글'로 보일 뿐이다. 그리고 내게 진정으로 완전히 '진짜 글'로 보일만한 글은 오로지 나만 쓸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런데 나는 삶에 대해 너무나도 미숙하다. 내면을 들여다보기는 커녕 바깥에 사람 바글거리는 곳만 가도 정신이 어지러워 속을 잃어버린다. 내가 나를 아는 정도, 내가 나를 형성해낸 정도, 그것은 24살의 나이에 비추어보았을 때 느린 것인가, 빠른 것인가? 답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답을 찾을 지 말 지를 결정할 사람도 나밖에 없다.

온전한 내면의 일기를 찾고 있다 -그 사람의 속을 볼 수 있는 글. 속은 명확할 수 없다.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고 오로지 몇 가지의 흔적만으로 '유추'해내야만 하는 난해한 것이다. 내면을 표현하는 글은 필연적으로 난해하고, 때로는 아포리즘, 격언이나 모호한 글귀와 같은 형태를 띤다.

서점에 도착해 에세이 서적들을 찾아본다. 인터넷으로 알아봐두었던 책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서적의 위치를 검색할 수 있는 컴퓨터 앞에 선다. 키캡이 동그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의 키보드로 한 자 한 자 책 이름을 적는다.

책의 위치가 출력되어 나온다. 'J16-6.' 아까 보았던 책장이다. 다시 찾아가 밑 쪽에 꽂혀있는 책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찾았다. 김언의 '사유노트.' 제목이랑 표지만 보고 왠지 모르게 꽂혔던 그 책.

서적을 펼쳐 내용을 훑어본다. 처음 든 생각은 '나와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었구나.' 그 책은 일종의 파편집이었다. 자기 내면의 사고를 풀어낸 책. 특히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으로. 그러나 그것은 기술이나 직업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에 가까운 것이었다.

역시 거의 아포리즘에 가까운 작법. 동일한 단어를 다음 문장에 또 쓰고, 비슷한 내용의 문장을 다음 문장에서 또 변주하고. 그 안에 파묻혀 있는 고요하고 미적인 내면이 한 단락 한 단락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서서히 밝혀지는, 의식적인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느낌과 이해의 대상. '이것이 글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찾던 그 글이다.'

일단 투박하게 부딪히다보면, 방법은 자연스레 칼을 갈듯 날카롭고 세련되게 모양 잡힌다. 내가 나를 알아나가는 과정, 그것은 내가 나의 삶을 찾아나가는 과정, 동시에 내게도 나의 이야기가 있음을 스스로에게 확인시켜나가는 과정이다. 또 그것은 비로소 내가 나를 존중할 수 있게 되는 초석이다. 내면 탐색을 하는 사람은 타인의 외양과 친구가 될 수 없다. 오로지 내면과만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자주, 그 친구는 글이다. 말로는 풀어낼 수 없는, 말로 풀어내기에는 너무 장황하고 난해한, 그러한 글. 공허함 속에서 그러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을 언제나 기다려왔다. 여기서 나는 친구 하나를 찾은 것이다.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다. 나는 솔직히 사람을 가려 사귄다. 내 눈에 '쿨해 보이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쌀쌀맞게, 심심하거나 뻘쭘할 때, 그러니까 내가 아쉬울 때에만 말을 걸고, 그 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이들에게도 자신의 삶은 있다.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든, 존중하든 무시하든, 그들에게도 나와 같은 삶이 하나 주어져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기준을 나에게 대입해보자. 나는 쿨한 사람인가, 찌질한 사람인가? 내 스스로 관찰해온 나는 찌질함에 가까운 사람이다. 남의 말을 과하게 신경쓰고, 언제나 '소외되지는 않을까' 가슴 졸이며 인간관계에 있어 스스로를 갉아먹는 재질. 그래서 쉽게 오버를 떨거나, 반대로 과하게 침묵하는 사람. 언제나 타인 앞에 서면 자기 자신을 잃는 사람. 진지한 말을 할 때에도 왠지 모르게 비웃음 받거나 무시받는 사람. 적어도 그것은 내가 지닌 면면들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내게도 삶은 있다. 분명히 그것은 내 깊숙한 곳에 파묻혀져 있다. 남이 꺼내줄 수는 없다. 내가 꺼내야한다. 깊은 곳에 묻혀있는 것을 꺼내려면 많은 삽질을 해야한다. 많은 허탕을 쳐야하고, 허튼 일처럼 보이는 무수한 작업들을 해내야한다. 응원해줄 사람은 없다. 스스로 해야한다.

내가 나의 삶을 찾았을 때, 비로소 나는 남들과 평등해질 것이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써내려갈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곁할 친구는 타인의 내면이 담긴 글, 그리고 나의 내면이 담긴 글. 내 앞에 이따금씩 놓이게 되는 그러한 글들이다. 인내심이 없는 나는 글로써 사람 읽는 법을 배워나갈 것이고, 글로써 사람을 쓰는 법을 배워나갈 것이다. 마침내 그 방법을 충분히 익혀 내가 조금은 더 능숙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때 나는 비로소 어떠한 결핍도 없이 당신의 눈을 바라볼 것이다. 당신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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