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6.목덜미에 짠 땀이 흐를 듯한 팔월이었다

6.목덜미에 짠 땀이 흐를 듯한 팔월이었다

by lee

6.

“여보세요.”

“권수혁씨 맞나요?”

“맞는대요.”

“저예요, 김지영.”

“어,,,,,,어쩐 일이야.”


그의 건조한 대답에 아차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나의 전화를 반기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함께 밤을 보냈던 새벽, 그는 나를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내며 말했다.


“전화할게.”

“번호 알아요?”

“아, 그렇지.”


그가 내 폰을 쥐고 꾹꾹 번호를 눌렀다.


“전화할게.”


긴 손가락으로 택시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며 남겼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후 며칠 동안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괜한 문자 알림에 마음이 설렜지만, 번번이 그가 아니었다. 그의 무소식은 나름의 메시지였지만, 나는 혹시 번호를 잘못 받은 것은 아닐지 의심했다. 일부러 연락하지 않는다는 가정은 하지도 못한 채.


“바쁜 것 같은데 끊을게요.”

“그래, 나중에 통화하자.”


황급히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가 먼저 전화를 끊는, 통화를 불편해하는 그를 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그 날 밤은 무엇이었을까? 옛 애인을 만나 하룻밤으로 추억을 매듭짓는? 에로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비참했다.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싶었지만, 비참함을 느꼈다. 비참함이라는 단어를 쉽게 인용하지만, 살면서 비참함이라는 기분을 느끼는 순간은 자주 오지 않는다.

시험을 못 친다고 비참하진 않다. 엄마한테 혼난다고 비참하진 않다. 비참함이란 적어도 비 오는 날 반 지하 천장에서 새는 물 때문에 장판이 젖어있어 드는 것을 지켜만 볼 때, 아니면 오지 않을 그 사람을 기다리다 갑자기 내린 비에 온몸이 다 젖은 채로, 집으로 걸어갈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정수리에 닿는 유월 한 낮의 햇살이 뜨겁게 느껴졌다. 키스하던 그의 입김이 떠올랐다.


“너를 좋아해.”


사랑할 이유가 넘쳤던 사월의 여름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은 아닐까. 감정 없이 그저 그런 스킨쉽만이 목적인 관계, 혹자는 불륜이라 부르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지나있었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언어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대부분 어린이 혹은 초등 저학년의 학생들이다. 학생들은 방과 후 복지관을 찾았기에 저녁 야근은 필수였고, 그것이 이 복지관에서 꽤 오랫동안 언어치료사를 구하지 못한 이유인 듯했다. 저녁을 함께할 가족도, 애인도 없는 나에게는 안성맞춤의 자리였다. 적어도 일하는 중에는 잡념을 가지지 않을 수 있으니.

장애인 복지관이 일반 복지관과 차이가 있다면 약간의 도움만 있다면 장애인임이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의 경증부터, 도움 없이는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중증 장애인까지 케어해야 한다는 점이다. 중증 장애인에는 신체적 장애가 있는 이부터, 인지적 장애가 있는 이까지 그 범주도 다양하다. 그렇기에 언어치료사는 장애인복지관에서 얻을 수 있는 자리 중 가장 편한 자리에 속했다. 적어도 치료실이라는 분리된 공간이 있고, 환자를 들고 업는 육체적 업무로부터는 자유로웠으니까. 하지만 세션이 없는 시간엔 종종 다른 업무들에 불려 갔고, 나 역시 그 부름에 냉랭하게 ‘제 일이 아닌데요’ 라고 말할 만큼 뻔뻔하지는 못했다.

복지관은 매달 첫째 주에 물품 배달을 받았다. 기저귀, 휴지, 물티슈 등 생활복지관에서 필요한 물건들은 가지 수부터 양까지 어마어마했다. 배송업체가 내려놓고 간 물건을 옮기는 데에는 전 직원이 동원되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날도 어김없이 배송 온 물건들을 옮기고 있었다. 기왕이면 빨리 해치우자는 생각으로 손수레에 박스들을 실었다.


‘이 정도는 밀만한데?’


여러 번 오가는 수고로움을 줄이려 너무 무리한 것인지 손수레가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중간에 물건을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이렇게 무거운걸. 다치면 어쩌려구요.”


생활복지사 정 선생님이었다.


“빨리 끝내야죠.”

“천천히 해도 괜찮습니다.”


정 선생님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 선생님은 귀하다는 남자 사회 복지사였다. 사무실이 있는 동관은 언어치료실이 있는 서관과 반대여서 마주친 일은 별로 없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람 좋고 성실하고 일 잘한다는. 그 칭찬에는 복지관의 힘든 일들을 은근히 정 선생님에게 미루려는 압력도 있었다. 정 선생님은 마다하는 나를 제쳐두고 혼자 짐을 옮겼다.


“고맙습니다.”

“저, 혹시 언어치료실에도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그의 말을 다 듣기도 전, 나는 목례로 인사하고 뒤돌았다.

그 날 오후,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사무실 책상에 쪽지가 붙은 유리병 하나가 놓여있었다. 꿀차였다.


‘피곤해 보이셔서 두고 갑니다. 정이삭.’


방금 다녀간 듯, 꿀차에는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수 없었다. 그는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정이삭. 그는 수혁을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지난 번 원나잇을 한 수혁이 아닌,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속삭이던 그때의 그를 닮아있었다. 속이 보이는 행동도, 무심한 듯 다정한 태도도.


“정 선생님이 친절하니까, 선생님한테만 다 시키는 거 같아요.”


이제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내가 예의 없게 말해도 그는 웃기만 했다.


정 선생님은 가끔 보다 자주, 꿀차를 문에 걸어두었다.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꿀차 대신 아메리카노가 나을 것 같았지만,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사양하겠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가끔 그가 사무실로 들어와 직접 건내 줄 때도 있었다.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려는 낌새가 보이면, 일이 있다며 그를 내보냈다. 그것은 내 나름의 배려였다.

정 선생님은 과분한 사람이었다. 나는 연애 상대로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아니, 얼마 전 수혁과의 일만 생각해 보아도, 그를 밀어내야 하는 이유로 충분했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좋아한다는 것의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아마 그가 직장동료가 아니었다면, 거리낌 없이 그를 만났을지도, 또는 쉽게 집으로 데려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정 선생님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나름의 배려였다.

하지만 선을 두는 나의 태도에도 정 선생님은 문을 두드렸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내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여름 자두가 잘 익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네요. 빗길 조심하세요.’


응답을 기다리는 그의 메시지가 안쓰러웠다. 나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라는 것은 진심이었다.


여름은 더위의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기온은 매일 최고기온을 경신하고 있었다. 대여섯 시에도 한낮까지 뜨거운 여름, 나는 아스팔트 열기가 이글거리는 시간에 집에 가기보다 해가 떨어지고 퇴근하는 것을 택했다.

복지관 앞에는 때로는 운동장으로, 때로는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간이 있었다. 복지관에서 대문까지는 직선거리 500m 가량이었다. 물리적 거리라는 것은 때로는 의미가 없다. 처음 이곳에 면접을 보러 오던 날, 뻗은 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 내리던 그날의 이 거리는 만 년 같았다. 합격하더라도 매일같이 이 거리를 어떻게 걸어야 할까 고민될 정도로.

하지만 요즘 같은 날, 일찍이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푸릇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걸을 땐 이 거리가 짧게 느껴졌다. 아쉬울만큼. 숫자란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언어라 했지만, 변하지 않더라도 변하는 것은 있다. 절대적이라고, 명확하다고, 무엇에서 그것을 주장할 수 있을까?

멀리서도 복지관 대문 옆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대문 옆으로 지는 해를 받아 길쭉이 늘어나있는 그림자. 그림자에서도 조금 긴 머리칼과 오른쪽 어깨에 맨 백팩이 보였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묻지 않아도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웃음이 났다. 그에게 나를 발견할 기회를, 먼저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김 선생님. 지금 퇴근하세요? 마침 저도 퇴근하는 길이었는데, 괜찮으시면……”


어색한 그의 연기에 웃음 터져 나왔다. 내 웃음에 그의 얼굴에 당황함이 스치는 것이 보였다.


“저녁 먹어요.”


내가 먼저 말했다. 폴로티의 접힌 깃과 까만 백팩에서, 무엇인지 모를 향수가, 아련한 따뜻함이 올라왔다.


‘그냥 지나가는 마음이야. ’


“저, 그럼 뭐 좋아하시나요? 근처에 파스타 맛있는 곳이 있는데……”

“술집은 없나요?”


그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계속해서 그를 놀리고 싶어지기도 했고 동시에 잘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아……술 잘하세요?”

“못 마셔요. 데려다주셔야 돼요.”


그의 눈동자가 더욱 흔들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해가 떨어진 뒤에도 여름의 밤은 더웠다. 파스타를 먹고 파스타와 함께 맥주를 마셨다. 밝고 유쾌한 분위기였다. 그의 부드러운 이끎이 편안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떨림이나 흥분과는 다른. 그것은 오랫동안 놓여있어도 괜찮을 듯한, 잔잔한 곳에 떠있는 듯한 편안함이었다.

그와 함께 집으로 걷는 동안 그의 손이 내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나의 손을 잡을 듯 말 듯, 갈 곳 잃고 헤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또 웃음이 터졌다.


“여기예요.”

“아, 벌써 다 왔군요.”


집 앞, 그가 아쉬운 듯 말했다. 그러고는 주섬주섬 가방을 내려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혹시 선물이라도 준비 한 건가……’


마음이 불편했다. 무엇인가를 받는다는 것이. 직장동료와 밥 한 끼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저녁이 변질하는 듯 여겨졌다. 그가 가방에서 누런 재생지로 싸여있는 무엇인가를 꺼냈다. 복지관에서 물건을 포장할 때 쓰는 종이였다.


“이거 별건 아니지만……”

“아, 뭔진 모르겠지만 먼저 사양할게요.”


손사래 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나의 모습을 예상치 못한 듯, 그가 허둥지둥 노란 종이를 벗겨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너무 약소해서……”


그것은 꽃다발이었다. 고급스럽고 풍성한 꽃다발이 아닌, 여름 풀꽃을 엮어 묶은 작은 꽃묶음이었다.


“풀꽃을 좋아한다고 하셨죠?”


그것은 언제가 복지관 소식지 직원 소개에 내가 썼던 글귀였다.


‘저는 풀꽃을 좋아합니다. 그 소박함 때문이 아니라, 꽃의 생김과 생명력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풀꽃은 파는 꽃집은 없어요. 그건 아마도 풀꽃은 너무 흔하기 때문이겠죠. 흔한 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그런 꽃집이 생긴다면 저는 날마다 그곳을 찾을 것 같습니다.’


꽃묶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꽃묶음을 꽉 쥐고 있는 그의 손을.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밤에도 가실 줄 모르는 더위 때문일까. 그의 얼굴이 붉었다.


“감사합니다.”

“감사……”


그가 말 끝을 흐렸다.


“감사 말고……좋아하면 안될까요?”


그가 말했다.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이토록 남자다운, 테스토스테론을 뿜어내는 덩치 큰 남자가 내 앞에서 떨고 있었다. 단지 나를 좋아하기 위해서.


“좋아요.”


나도 모르게 나온 대답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짙은 눈썹에서, 끝이 날카로운 눈매에서, 벌어진 입술에서, 차오르는 그 환희. 그를 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따뜻한 포옹이었다.


“고마워요.”


그가 나를 꽉 안았다.


“고마워요.”


그가 다시 말했다.


‘내가 뭐라고 나를 이렇게 좋아해요.’

그의 품은 따뜻했다. 가만히 있어도 목덜미에 짠 땀이 흐를 듯한 팔월이었다.

이전 05화치유 5. 혹은 불륜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