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좋은 사람
8.
아스팔트를 녹일 듯 뜨겁던 열기가 사그라 들고 있었다. 복지관 앞에서 정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길에 버려진 아이스크림 껍질이 바람에 날렸다. 여름, 축축하게 내려앉았던 공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가을이 오는 신호였다.
정 선생과 약속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애매한 관계가 직장에 미치는 영향 때문도 아니었다. 정 선생과 나의 업무는 달랐고, 우리 사무실은 동관과 서관, 완전히 반대에 있었기에 일부러 찾지만 않으면 마주칠 기회조차 적었다. 하지만 영화관 일 이후 어색한 기류를 풀어내고 싶었던 건 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수혁 선배의 연락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복지관 대문에서 기다리던 내가 다른 직원들과 함께 나오는 그를 불러 세웠다.
“정 선생님!”
“뭐야, 지영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렇게 표 내도 되는 거예요 두 사람?”
함께있던 직원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먼저 가줄게요. 내일 봐요.”
“안녕히 가세요.”
목례로 사람들을 보내고 그가 물었다.
“어쩐 일이세요.”
낯선 일일 것이다. 명백히 낯선 일이었다. 내가 정 선생님에게 무엇을 먼저 청한 것도, 암암리에 알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우리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내 말에 내가 흠칫 놀랐다.
‘이야기 좀 하자.’ 그것은 영화관에서 만남 이후 수혁이 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 말에 보였던 나의 반응도 떠올랐다. 갈망했던 동시에 쓰레기같다 여겼던. 정 선생님은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느꼈던 옅은 혐오감과 깊은 동조 속에 고민하고 있을까?
“네, 그러죠.”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선한 눈빛, 평온한 표정,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띄어져 있었다.
‘그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나를 시험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다시금 격한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것은 고마움, 후회, 원망, 자책. 무엇이라 꼬집을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였다.
“우리, 잘 지내요.”
정 선생님이 말했다. 그것은 내가 해야 했던 말이었다. 이번에도 손 내민 것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그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나에게 관계의 책임을 맡기지 않았다.
정 선생님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 담긴 의미는, 지난 것과 앞으로의 것을 안고 가겠다는 제스처였다.
그의 큰 손을 바라보았다. 느낄 수 있었다. 이 손을 마주잡으면, 그와의 관계가 지금과는 달라질 것이라는. 더 깊고 진지한 그의 감정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는.
나는 그의 손 위에 내 오른손을 포개었다. 그가 힘주어 깍지를 꼈다. 깊은 마음이 전달되었다. 그럴 수록 나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고마운 마음과 별개로 그와의 관계가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