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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육진심 Feb 28. 2024

‘육아 실패는 부모 탓?'

영화 속 세 어머니를 위한 모성변론

여기 세 어머니가 있습니다. 



총기 난사로 사람들을 죽인 살인자 아들을 둔 엄마, ‘에바’


발달장애아를 키우며 예정에 없던 셋째를 임신한 엄마, ‘말로’


자신의 인생을 찾기 위해 딸들을 버리고 떠났던 엄마, ‘레다’


사람들은 이들을 실패한 어머니라고 손가락질합니다. 


세 명의 어머니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먼저, 케빈의 엄마인 ‘에바’의 이야기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예술가였던 에바는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펼치고 싶었지만, 임신으로 인해 꿈을 포기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케빈은 까다롭고 예민한 기질에 정서적인 교류가 어려운 아이였습니다. 

산후우울증에 걸린 에바는 케빈의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아이의 불만은 쌓이다 못해 넘쳐버렸죠. 


사투를 벌이는 에바와 달리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아내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에게조차 위로와 격려를 받지 못한 에바는 무기력과 우울을 감당할 수 없었고, 점점 심해지는 케빈의 반항으로 인해 둘 사이는 멀어져만 갔습니다. 

동생이 태어나자 엄마의 관심은 동생에게만 향했고 케빈의 질투와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케빈은 학교 체육관의 문을 잠그고 안에 갇힌 아이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화살을 쏩니다. 

잔인하게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의 목숨까지 빼앗은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살인마의 엄마라며 욕을 하고 집에 오물을 던져도 엄마는 아들 근처에 남아 아들을 보기 위해 교도소로 향합니다. 후회도 사과도 하지 않는 아들에게 분노의 감정이 드리우지만, 그건 잠깐일 뿐입니다. 

분노의 이면에는 ‘미안함과 슬픔, 두려움과 사랑’이 숨어있으니까요. 


엄마는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아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아들의 존재를 버거워했던 지난날을 속죄하는 심정으로, 엄마는 오늘도 서랍 속에 들어있는 아들의 옷을 꺼내 빨고 다리기를 반복합니다.



두 번째 만날 ‘말로’는 세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임신 중인 말로에게는 이미 두 아이가 있습니다. 특히 발달장애가 있는 둘째 조니가 학교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이자 말로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셋째의 임신 소식이 반갑지만 않은 이유는 세 아이의 육아와 가사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가 태어나고 산후우울증에 걸린 말로는 ‘텅’ 비어 버린 채, 서서히 자신을 잃어갑니다. 

집안은 엉망이고 아이들은 방치되고 남편과의 사이마저 삐거덕거리는 그때, 야간 보모인 툴리가 찾아옵니다. 

툴리는 능숙하게 매일 밤 갓난아이를 봐주고 집안일까지 해줍니다. 


그녀는 아이뿐만 아니라 당신을 돌보러 왔다고 말하며 말로의 미소를 되찾게 해 주죠. 

일상을 회복한 말로는 툴리에게 많은 것을 의지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툴리는 이별을 선언하고 사라집니다. 말로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세 명의 새엄마 밑에서 자란 말로는 아이들만큼은 외로움과 슬픔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툴리 없이 혼자선 해낼 자신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구원자처럼 나타난 툴리는 진짜가 아니었습니다. 


그림자처럼 빛을 잃어가는 자신을 위해 말로가 만들어 낸 새로운 ‘자아’였지요. 


긍정적이고 열정이 넘치는 26살의 말로는 툴리가 되어 현재의 나를 돕기 위해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말로는 자신 안에 툴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녀는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삶에서 힘없이 주저앉거나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나 툴리가 함께하니까요. 



마지막으로 두 딸의 어머니 ‘레다’를 만나보실까요?


언어학을 공부하는 레다는 학업과 육아를 병행하지만, 둘 다 완벽하게 해내기엔 한계를 느낍니다. 


학회에서 언어학자로서 역량을 인정받은 레다는 딸들을 남편에게 맡긴 채 집을 떠납니다. 


3년 동안 아이들을 찾지 않은 엄마, 엄마는 그 시간이 좋았다고 회상합니다.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된 레다는 언어학 교수가 되고 그리스의 작은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니나와 그녀의 딸을 만나면서 과거의 자신을 마주합니다. 


엄마라면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며 자신의 꿈이나 욕구 따윈 무시하고 살아야 한다는 모성 담론에 거칠게 저항한 레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이기적’이라고 평가합니다. 


딸들을 떠나 좋았다는 레다에게 니나는 묻습니다. 

“좋았다면서 딸들에게 왜 돌아갔어요?”

“엄마니까...... 애들이 보고 싶어서요.”


레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엄마니까’ 이래야 한다는 명제가 아니라 자신만의 명제를 발견합니다. 


‘엄마니까 애들을 사랑하고, 애들을 사랑하기 위해선 나도 사랑해야 한다. 나를 사랑하려면 나의 욕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딸들을 떠나 자신의 꿈을 이뤘지만, 레다는 자신을 ‘비뚤어진 엄마’라며 자조합니다. 


사실 레다는 어린 시절 방임과 학대 속에 자랐습니다. 그녀는 모성을 배울 기회가 없었지요. 

하지만 ‘엄마이기에’ 딸들에게 부족한 모성이라도 주기 위해 돌아온 것입니다. 

아이들에겐 ‘비뚤어진 엄마’도 ‘나의 엄마’니까요. 



모성이란 무엇인가?


영화 속 세 어머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모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아이를 키우는 힘과 능력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연료통의 반만 채워진 채 부모가 되고, 어떤 사람은 텅 빈 연료통을 가진 채, 아이를 낳아 기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부모의 잘못이나 죄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너무 많은 과업과 부담을 안겨주며 무조건 해내라고 독촉합니다. 

물론 아이를 잘 키우면 좋겠지요. 그건 부모도 바라는 일입니다. 


그런데, 육아의 주체는 부모 두 사람뿐인가요?


그렇다면, 아이는 키워지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일까요?


아닙니다. 아이도 양육 과정의 '능동적인 주체'입니다. 


다시 말해, 아이도 부모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아이가 까다롭고 예민해서 부모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고, 부모를 밀어내거나 매달리며 온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다 쏟아붓게 하는데, 아무도 부모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누구도 부모다운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영화 속 세 어머니의 공통점은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 
믿을만한 ‘조력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사랑할 힘도 없는 상태가 되면, 양육은 지옥 체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향한 '따듯하고 다정한 시선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아이가 너무 춥겠다. 이런 날은 나오면 안 되지.”라는 충고 대신,  
"엄마가 추운데 아이랑 나오느라 힘들겠네요.”라는 격려를 해주세요. 


추운 날 어린아이를 데리고 외출했다고 “아이가 너무 춥겠다. 이런 날은 나오면 안 되지.”라는 충고 대신 “엄마랑 같이 외출해서 좋겠다. 엄마가 추운데 아이랑 나오느라 힘들겠네요.”라고 격려하며 부모의 마음에 온기를 더해주세요. 



출산율 0.0% 시대의 도래를 막기 위해


식당에서 뛰어다니는 아이 때문에 괴롭고 불편하겠지만, 그 아이마저 없으면 출산율 0.0%의 시대가 올 수도 있습니다. 


무례하게 구는 아이에게 주의를 줄 수는 있겠지만, ‘맘충’과 같은 말로 아이를 키우는 일을 수치스럽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아이가 없어도 누구나 실수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아이까지 있으니, 부모는 더 마음 졸이며 눈치 속에 아이를 키우는 거죠. 


저출산의 문제는 부모를 위한 ‘물질적 지원’보다 ‘심리적 지원’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들이 단순히 돈이 없어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혼자 육아의 부담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심리적 환경이 마련되지 않아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아이를 키우며 냉랭한 시선을 받고, 아이가 잘못되면 부모의 탓이고, 그러면서 양육을 위한 도움마저 인색하다면, 누가 아이를 낳아 키울까요?



'부모를 위한 연민'이 간절한 시대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상대가 느끼는 공포를 함께 체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필립 피셔

하버드대학의 교수인 필립 피셔는 '진정한 연민이란 상대가 느끼는 공포를 함께 체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아이를 낳아 잘 키워야 된다는 부모의 부담과, 난관이 닥칠 때마다 부모들이 느끼는 공포를 공유해야, 비로소 마음 편히 아이를 잘 키울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육아 실패’를 부모의 탓으로 돌리며 마녀사냥을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부모들이 편안하고 자신 있게 아이를 양육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생산적입니다. 


아이라는 존재는 가족뿐만 아니라 아이가 속한 우리 사회, 세계의 일부니까요. 


 자녀와의 ‘Bad Fit(잘 맞지 않는 나쁜 관계)’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차곡차곡, 매일매일, 육아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하고 소외된 채, 아이와 둘이서 고군분투하는 부모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질 때, 아이와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 부모에게 아이를 잘 키우라는 충고보단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세요. 


부모도 인정과 칭찬 속에서 ‘부모다움’이라는 역량을 키워가니까요. 


그리고 그 부모다움이 자녀와의 ‘행복한 관계’의 시작이 됩니다.




사진 출처 

https://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1766486

https://ppss.kr/archives/189192

https://vop.co.kr/A000005227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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