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아이에게 '마법의 콩'을 주지 않을 때, 베드핏이 됩니다.
세 명의 부모와 산 아이가 있습니다.
운명이 짓궂게 이 아이에게만 장난을 친 건지 아이의 삶 앞에 레드 카펫 따위는 없었죠.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면 부모에게 ‘마법의 콩’을 받아야 합니다.
이 콩은 누구에게나 필요한데, 왜냐면 살면서 겪게 될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거든요.
하지만 가난한 부모에겐 아주 어렵게 얻은 딱 하나의 ‘마법의 콩’만 있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했지만 단 하나뿐인 ‘마법의 콩’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콩을 주고 나면 간신히 자신을 지켜줄 힘을 잃고 말 테니까요.
부모의 인색한 모습에 아이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부모에게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고 믿게 된 아이는 새로운 부모를 찾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법의 콩’이 없는 아이는 사람들이 거친 눈빛을 던지고 조롱하며 비난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세상이 무섭기만 한 아이는 우연히 새 부모를 만났습니다.
아이는 이제 자신도 마법의 콩을 갖게 될 거란 기대에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부모는 아이에게 마법의 콩을 주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말을 잘 들으면 콩을 주긴 했는데 자세히 보니 마법의 콩과 비슷하게 생긴 콩으로 먹으면 먹을수록 중독되는 콩이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콩을 가져본 적 없는 아이는 허기에 시달려 두 번째 부모가 주는 독성이 있는 콩을 그대로 삼켰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기운을 잃고 슬픔에 사로잡혔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받은 콩이 ‘마법의 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이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새로운 부모를 찾아 나섭니다.
다행히 아이를 불쌍하게 여긴 한 부부가 아이를 받아줍니다.
아이는 이제 마음에 힘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에 얼굴에 미소가 만연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도둑은 부모가 갖고 있는 ‘마법의 콩’을 모두 가져갔습니다.
부모는 절망 속에 매일 눈물을 흘립니다.
아이는 더는 ‘마법의 콩’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마법의 콩은 바로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과 관심’입니다.
'마법의 콩'이 있어야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삶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으니까요.
아이는 세 명의 부모를 만났고 ‘마법의 콩’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왜 아이에게 ‘마법의 콩’을 주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아이에게 줄 ‘마법의 콩’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부모나 주변 사람들에게 ‘너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이야.’라는 대우를 받아보지 못했으니, 내면에는 아무것도 없이 평생 가난한 마음을 갖고 삽니다.
단 하나의 ‘마법의 콩’을 겨우 가진 부모는 인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악의적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들도 애정에 목마름을 느끼며 어릴 적 받지 못한 '마법의 콩'을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해야 했던 불쌍한 사람들인 겁니다.
자신의 부모로부터 너무 많은 돌봄과 관심을 받은 사람은 지나친 자기애애 빠져 주변 사람들의 애정을 모조리 흡수하려고 합니다. 자녀의 사랑까지도 말이죠.
그러니 아이에게 가짜 콩을 주면서 ‘진정한 애정’인 ‘마법의 콩’은 주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자신의 것은 모두 특별하기에, 아이에게조차 자신의 것을 줄 수 없는 겁니다.
이러한 부모들은 자신의 외모, 성격, 능력에 대해 기쁨을 느끼고 감탄하며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랍니다.
자신의 위대함과 전능함에 스스로 매료되어 나르시시스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요.
이들은 아이에게 충분히 ‘사랑과 관심’을 줄 의지가 있는데, 줄 수가 없습니다.
한 어머니는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첫째 아이가 불치병에 걸려 사망하는 일을 당합니다.
둘째 아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필요한 관심과 돌봄을 주지 않자 생존을 위해 매달릴 뿐이죠.
아이는 ‘마법의 콩’ 즉,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는 부모의 보살핌이 없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아이가 매달릴수록 부모는 아이를 밀어냅니다.
아직 첫째 아이를 잃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부모는 당장 자신에게 닥친 엄청난 위기를 이겨내느라 ‘마법의 콩’을 다 써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아이에게 줄 ‘마법의 콩’은 영영 사라집니다.
’ 마법의 콩‘이 없는 아이는 어떤 사람이 될까요?
유난히 과장되게 웃긴 표정을 짓고 동물이나 다른 사람의 행동을 따라 하며 관심을 끄는 아이들이 있지요? 사소한 것 하나만 성공해도 달려와서 보란 듯이 과시하는 인정을 갈구하는 아이, 어떻게 느끼시나요?
아이가 부모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도 과도한 표현은 줄어들지 않고 다른 사람 앞에서도 흔한 말로 ‘오버 액션’을 해서 불편함을 준다면, 부모에게 ‘마법의 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육지책으로 스스로 결핍을 채우려고 하니까요.
부모에게 받지 못한 ‘마법의 콩’을 얻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지리 않는 거죠.
내면이 텅텅 비어버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쉬지 않고 말을 많이 하거나 음식을 탐하거나 물건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내면의 결핍이 오래되면, 사막처럼 변해서 아무리 물을 줘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대상관계이론에서는 아이가 엄마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이 엄마와 한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개별화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보는데요.
부모가 아이에게 ‘마법의 콩’을 든든하게 채워주며 세상으로 길을 떠나라고 할 때, 아이는 부모라는 대상과 건강하게 분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부모가 단 하나의 마법의 콩도 주지 않고 세상에 아이를 내보내거나, 세상은 위험하다며 마법의 콩을 주지 않은 채 떠나지 못하게 한다면, 아이는 계속해서 ‘마법의 콩’을 찾아 헤맬 겁니다.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며 어머니와 분리되기 이전, 서로 한 몸처럼 붙어 공생하는 시간은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의 기초적인 틀을 형성하는 시기입니다.
이때 부모가 아이에게 '진정한 사랑과 관심, 돌봄'을 주지 않으면, 아이의 내면에 삶의 위협과 장애를 이겨내는 힘인 '마법의 콩'이 존재하지 않는 거죠.
그렇게 필요한 돌봄과 애정을 받지 못하면 아이는 엄마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며 매달리거나, 나라는 존재를 조각조각 파편화시켜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됩니다.
나는 ‘마법의 콩’을 얼마나 갖고 있을까요?
아이에게 진짜 ‘마법의 콩’을 주고 싶은데 가진 게 없다면,
지금이라도 나를 돌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이를 세상으로 내보내기 전에 든든하게 ‘마법의 콩’을 채워줘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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