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내면의 목소리'에 대처하는 방법
“여보세요?”
“아니, 아이한테 게임하라고 하고 드라마를 보면 어떻게 해. 그러니 애가 공부를 안 하지!.”
“아, 네......”
전화를 끊자마자 또다시 벨이 울립니다.
“여보세요?”
“오늘 도서관 봉사하러 갈 때 멋있게 좀 입고 가. 그래야 사람들이 너한테 관심을 갖고 아이도 좋게 볼 거 아니야.”
“아. 눼눼.”
잠시, 전화선을 끊어버릴까?라는 유혹에 빠져듭니다.
아빠에게도 전화가 오네요.
“여보세요?”
“퇴근하고 와서 휴대폰만 본다고? 아이랑 산책도 하면서 대화를 해야 가까워지지. 그러니까 아빠가 와도 인사도 잘 안 하잖아.”
'따르릉 따르르릉'
결국 수신 거부 버튼을 누르고 맙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거는 이 분, 바로 ‘마음속 비판자’인데요.
‘마음속 비판자’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다지 좋은 말을 하진 않습니다.
주로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알려주는 일을 하죠.
내가 잘 되라고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지적하는 말만 하니 의기소침해지면서 자신감이 떨어지네요.
하루 종일 누군가 따라다니면서 잔소리를 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눈치 보느라 뭐 하나 제대로 하기가 힘들겠죠.
그런데도 '마음속 비판자'를 무조건 수신 거부해선 안 됩니다.
우선 수신 거부는 풀어놓고 '마음속 비판자'를 어떻게 대할지 알아볼게요.
정신과 의사인 요헨 파이힐은 마음속 비판자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파이힐에 의하면 '마음속 비판자'는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도록 돕고, 다른 사람들이 주는 상처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겁니다.
모임에 멋지게 차려입고 나가고 부지런히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라는 내면의 비판자의 조언대로 하면 사실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건 맞습니다.
'마음속 비판자'는 남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게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함부로 나를 대하며 공격하는 것으로부터도 지켜주는데요. 그 방식은 이렇습니다.
어릴 적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 속에 자란 한 남성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밥을 먹다가 쩝쩝 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습니다.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인 그는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지만, 아버지에게 왜 때리냐고 따지는 행동 대신 '마음속 비판자'의 목소리를 듣지요.
‘마음속 비판자’는 아버지를 화나게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야만 해.”라며 앞으로 같은 일로 인해 그가 상처 입지 않도록 주의를 주면서 자아를 보호하죠.
슬픈 일이지만, 이유도 모른 채 혼이 나는 아이들이 참 많습니다.
미국의 연구지만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4만 번 이상 혼난다는 사실을 아세요?
하루에 평균 20-30십 번 정도 질책을 받는다는 겁니다.
'늦게 자지 마. 텔레비젼 많이 보지 마. 친구랑 통화 너무 많이 하지 마. 동생이랑 싸우지 마. 사람들한테 인사 좀 해. 말대구 하지 마. 너무 많이 먹지 마.' 등등
아이의 뇌는 자신이 한 행동이 결과를 잘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학원 좀 안 간다고 무슨 큰일이 생기겠어? 친구한테 돈을 빌려서 게임 아이템을 사면 어때?'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자신이 한 행동에 무조건 책임을 지라며 혼을 내면 아이는 "그렇게 될 줄 몰랐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게 사실일 때도 있는데, 부모는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냐며 아이의 잘못에 잘못을 더해 더 크게 혼을 내죠.
이때 '마음속 비판자'가 나타나 아이에게 ’그냥 잘못했다고 하고 엄마 말대로 해.‘라고 충고합니다.
마음속 비판자는 자신과 하나인 아이가 혼나는 걸 보고 싶지 않거든요.
부모나 아이의 마음속 비판자는 괴팍하고 자기중심적인 자아로 보이지만 실상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상처를 피하도록 자아를 지켜주려다 보니, 과격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해도 거칠고 투박한 표현은 저항을 일으키기 마련이죠.
“잘못하면 엄하게 혼을 내야 아이가 나를 무시하지 않지!”
“미라클 모닝을 해야 사람들이 부지런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이번엔 승진해야 아이와 아내한테 능력 있다고 인정받을 수 있어.”
내면의 비판자는 주로 어린 시절 부모나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들의 가치를 내면화하며 만들어집니다. 그들이 왜 나를 비판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나를 꾸짖게 되는 겁니다.
'내가 이런 부분이 부족해서 지적을 받는구나.'
우리가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읽는 '거울뉴런' 때문인데, '거울뉴런'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읽게 해주는 신경이죠.
아이는 ‘거울뉴런’으로 인해 나를 비판하는 부모의 입장에 서서 부정적인 감정을 고스란히 같이 느끼고 나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상대의 말과 행동, 가치와 태도까지 나의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내면화'라 하는데, 이렇게 우리의 부모나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자신의 것처럼 내면화하면, 내 안에서 마음속 비판자가 태어납니다.
그는 자아를 발아래 놓고 다스릴 힘을 가진 절대 반지를 차지한 또 다른 나인 거죠.
우리의 내면에는 여러 자아가 모여 살고 있는데요.
어린 시절에 부모나 다른 사람들로 인해 상처 입은 채로 슬퍼하고 있는 과거 속의 자아인 '아이자아'와 성장해서 현재의 나로 살아가는 '어른자아', 그리고 아이자아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마음속 비판자‘가 있지요.
아이자아는 어릴 때 겪은 고통과 유사한 상황이 되면 깨어나서 힘들다고 울며 보챕니다. 그러면 '마음속 비판자‘는 아이자아를 달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당하지 않도록 엄격하게 주의를 줍니다.
'울지 마.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아? 최선을 다해 완벽한 모습을 보여서 다른 사람들 눈밖에 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어!‘라며 다그치죠.
'아이자아'는 할 수 없다고 울고, '마음속 비판자‘는 독촉을 합니다.
사실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고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어른자아'를 갖게 되면, 마음속 비판자와 아이자아 간의 갈등을 지혜롭게 중재합니다.
그런데 어른자아가 건강하지 못하면 아이자아와 마음속 비판자 사이에서 무기력한 채, 마음속 비판자가 아이자아를 꽁꽁 숨기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죠.
줏대가 없는 어른자아는 아이자아의 슬픔에 동화되어 옆에 앉아 같이 울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의 고통을 그대로 재경험하는 거죠.
이렇게 되면 마음은 혼란들도 범벅됩니다. 이성적인 계획과 판단을 해야 하는 어른자아가 제 역할을 못하니 마음속 비판자는 초조해집니다.
'그러니까 누가 남의 일에 참견하래? 괜한 소리 해서 너만 이상한 사람이 됐잖아. 누가 잘못해도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면 너도 그냥 모른 척하라고. 그러다 너만 왕따 시키면 어쩔래?'
내면의 비판자는 나에게도 지적을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에게 뭐라 하는 것은 더욱 싫어해서 철저히 나를 방어합니다.
그래서 마음속 비판자는 자신이 없으면 내가 잘 살지 못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마음속 비판자가 없으면, 우리는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릴까요?
물론 그렇진 않습니다. 예전보다 더 실수하고 잘못할 순 있지만, 그런 나도 나이니까요.
하지만 마음속 비판자의 역할이 불필요한 건 아니니, 내가 필요할 때만 전화를 받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마음의 비판자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는 거죠. 그 목소리가 무조건 옳다고 믿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난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말할 거야. 그게 나의 신념이야. 나를 따돌려도 상관없어. 다른 모임을 찾으면 돼.'
이러한 단호한 태도는 '아이자아'에게도 보여야 합니다.
'네가 어릴 때 얼마나 괴롭고 외로웠는지 알아. 항상 형이랑 비교당하고 사람들이 형만 칭찬해서 너 자신이 수치스럽고 싫었지? 그런데 그건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은 거야. 그리고 나는 그때의 네가 아니야. 어른이 되었고 이젠 그런 상황이 되면 사람들한테 틀렸다고 말하면서 나를 지킬 수 있거든. 나는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어.'
'어른자아'는 '아이자아'나 '마음속 비판자'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마음속 비판자'는 아이와의 사이에서도 내가 상처 입을까 두려워하며 집요하게 전화를 거니까요.
아이가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이를 혼내라는 마음속 비판자의 전화를 받는다면,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아이를 위해 화를 내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아이자아'가 깨어나서 ’네 아이도 나를 무시하잖아!‘라고 울면서 '마음속 비판자‘를 통해 아이를 혼내게 만드는 건 아닌지.
'마음속 비판자'는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막기 위한 방탄조끼를 입힌다는 명목으로 전화를 할 겁니다.
때로는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중 누구의 것을 들을지 혹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현재의 나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받지 말아야 할 때는 수신 거부 버튼을 눌러야 하겠죠?
지금 또 마음에서 온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고요?
무조건 받거나 끊지 말고 잠시 기다려보세요.
지금의 나인 '어른자아'가
나와 아이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요.
참고문헌
Peichl, J. (2017). 나를 외면하는 내면의 속삭임(신유진 역). 서울: 인터하우스.
사진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