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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육진심 Mar 11. 2024

언니가 건네준 '불안'

아이와 '베드 핏'을 부르는 독이 되는 부모의 감정: '불안'

어릴 적 언니는 나의 두 번째 엄마이자 제일 친한 친구였습니다. 

나의 언니는 나의 손에 무엇을 건넸을까.

엄마가 없을 때면 간식과 장난감을 챙겨주고, 자신의 나이에 맞지 않는 인형놀이며 숨바꼭질까지 같이 해줬으니까요.    


제가 초등학교 때 이미 중학생이던 언니는 어린 제가 미덥지 않았던지 매일 준비물을 확인하고 다음날 입을 옷과 양말까지 챙겨주었습니다. 


엄마는 공부도 잘하고 마음 씀씀이도 고운 언니가 동생까지 살뜰히 보살핀다고 흐뭇해하셨지만, 사실 언니는 불안한 사람이었습니다.      


“독후감 숙제 언제까지야?”

“그거, 24일.”

“그럼, 일주일 남은 거네. 책은 다 읽었고?”

“응.”

“근데 왜 아직 안 썼어?”

“쓸건대.”

“나중에 쓰면 내용 잊어버리니까 지금 써.”

“쓰기 싫은데......”

“조금이라도 써 놔. 알았지?”

언니의 독촉에 심술이 난 눈을 새로 산 인형의 집에 고정한 채 고개만 끄덕인 나는 그날 저녁 언니의 불안을 비켜 가지 못했습니다. 


“독후감 썼어?”

“......”

“안 썼어? 왜?”

“잊어버렸어.”

“빨리 지금 써.”

“자야 되는데......”

“다 잊어버린다니까. 공책 가져와.”

엄마가 말려도 소용없었습니다. 

기필코 언니는 나를 앞에 앉혀놓고 기억조차 희미해진 책의 빵 부스러기를 따라 가게 했죠. 


빵 부스러기의 끝엔 뭐가 있었을까요?     


“아, 맞다. 내일 비 온다고 했으니까 우비 챙겨야지.”

“반납할 책가방에 넣었나?”

“운동화 대신 장화로 바꿔야겠다.”     


거기엔 완전히 달라진 내가 있었습니다. 

결국 나는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메모를 하고 그 메모를 수시로 들여다보는 '철저한 어린이'라는 이름표를 받게 되었죠. 

언니 덕분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쏟아붓는 칭찬과 인정에 파묻혔던 나는 마냥 좋기만 했습니다. 

그게 독이란 걸 알지 못한 채로.


그렇게 어깨가 으쓱해질수록 준비에 준비에 또 준비를 했던 나는 언니처럼 불안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반찬은?”

“어머 깜빡했다.”

“뭐? 그거 가져다주려고 온 거잖아.”

“헤헤. 나중에 갔다 줄게.”

“엄마가 나 좋아하는 게장도 해서 보냈다며.”

“그러니까. 맛있겠더라.”

“웃음이 나와? 그것도 못 챙기는 게 말이 돼!”     


누구냐고요? 

결혼 후 완전히 달라진 나의 언니입니다.

엄마가 보내준 반찬 없이 빈 손으로 찾아온 언니는 ‘불안이 뭐예요?’라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나를 황망하게 만들었죠. 


그렇게 느긋하고 여유로운 형부를 닮아가며 언니의 불안은 낡아지고 색도 바래갔습니다. 

어쩌면 나는 언니와 불안이라는 보이지 않은 실로 연결되었다고 느꼈나 봅니다. 

게장이 아니라 언니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씩씩거린 걸 보면.     


지금 와서 생각하면 치사하지만? 언니가 불안에서 벗어난 건 좋은 일이었습니다. 

언니의 삶이 봄볕에 느린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처럼 편안해졌으니까요.   

   

사실 언니가 건네준 불안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어떤 일은 일어나기 전에 앞서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훨씬 감당하기 쉬우니까요. 

하지만 양날의 검처럼 불안에게 베어져 피를 흘리는 날도 많았죠.    

  

다행히 저는 언니를 무척 사랑했고 다시 한번 따라쟁이가 되기로 했습니다. 

언니의 여유와 편안을 모방하며 내 것으로 만들려 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완벽하게 보이기 위한 가면도 벗을 수 있었지요. 


언니는 아직은 새로운 변태는 하지 않은 채 현상 유지 중입니다. 

하지만 이제 불안이라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외투를 버린 저는 언니가 어떻게 달라지든 괜찮을 것 같네요.      

언니가 건네준 불안은 이제 제 손에서 떠났으니까요.           



부모가 아이와 베드 핏(잘 맞지 않는 나쁜 관계)을 이루게 되는 마음속 독이 되는 감정들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그 첫 번째는 바로 ‘불안’입니다.      



혹시 저처럼 누군가에게 불안을 건네받지 않으셨나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고 있나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잘 믿지 못한 채, 멀찍이 두고 나에게 상처를 줄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거나 아니면 항상 옆에 두고 나를 배신하는지 상대의 마음을 따라다니진 않으세요?     


만약 그렇다면 나는 ‘불안한 사람’인 겁니다.     

나는 아무도 믿지 못하는 불안한 사람일까

사실 불안은 ‘마음이 편하지 않은 상태’로 자연스러운 감정 중 하나죠. 

우리의 삶에 예기치 못한 일이 갑자기 벌어지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면 여지없이 불안이 찾아옵니다.      

사실 언니에게도 어린 나이에 감내할 수 없는 상처가 있어 불안한 사람이 되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죠.      

불안(anxiety)이라는 단어는 ‘수축하다, 죄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단어 ‘angor’와 그 동사형 ‘ango’에서 유래했는데요.      


불안은 ‘수축’, 즉 마음을 조여들게 만든다는 겁니다.


나쁜 일이 찾아올 거라는 고통스러운 예측을 하고 있으니, 탄력이 없어진 노년의 피부처럼 내면이 쪼그라드는 거죠.      


그렇게 불안은 내 마음의 탄력을 서서히 없애고 맙니다.      


아기 피부 만져보신 적 있으세요? 

탱탱볼 같이 손가락으로 누르면 피부 본연의 힘으로 손가락을 튕겨내죠. 

우리 마음도 외부의 충격을 튕겨낼 탄력을 갖고 있는데, 그게 바로 ‘회복탄력성’입니다. 


그런데 불안이 과도해지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고통과 슬픔을 튕겨내는 회복탄력성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온갖 걱정과 근심이 힘을 잃은 보호막을 뚫고 들어오겠죠. 

외부의 충격을 그대로 받으니 내면의 곳곳에는 피가 나고 상흔이 가득합니다. 

불안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은 이 아픔을 잘 압니다. 그래서 더 두렵고 초조한 거죠.      


‘내일 시험인데 애가 책도 보지 않고 친구랑 통화만 하니 가서 말을 해야 할까. 만약 말하면 지난번처럼 소리를 지르고 문을 잠가버리면 어쩌지?’     


엄마는 아이에게 시험인데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지만, 그 말 뒤에 따라올 아이의 반응이 걱정됩니다. 아이가 악을 쓰며 자신의 인생에서 엄마를 밀어내버리듯 문을 잠그는 행동 때문에 받는 상처를 걸러줄 보호장치가 엄마에게는 없으니까요.      


남편은 아이의 반항으로 갈등이 일어나도 잠깐 씩씩거리다 잊고 유튜브 영상을 보며 피식거리는데, 엄마는 그게 되질 않습니다.      


아이와 말다툼이라고 하고 나면 하루 종일 몸이 아프고 기운이 없죠.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기 싫어집니다. 

왜냐고요? 불안한 사람들은 에어백 없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과 같거든요.        


나는 왜 불안을 느끼는 걸까요?     


첫째, 거절에 대한 나의 마음 세포가 매우 예민하면 불안을 강하게 느낍니다.

    

거절 민감성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거절 민감성(rejection sensitivity)은 인지정서적 성향으로 타인에게 거부당할까 봐 불안해하고, 사소하고 모호한 단서도 거부로 지각하여, 거부당하는 것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성을 의미한다(Downey & Feldman, 1996).     
'NO'를 'NOOOOOOOOOOO!'로 받아들이는 나

여기서 중요한 건 거절 민감성이 높은 사람은 사소하고 정확하지 않은 내용조차 불안을 느낀다는 겁니다.  

    

누군가와 친해져서 같이 식사하자 했더니 상대가 다른 약속 때문에 어렵다고 합니다. 

진짜 중요한 약속이 있어 나의 제안을 거절했을 수 있는데, 나는 ‘NO’라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화끈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수치스러운 감정이 들죠.     

 

내가 뭘 하자고 물어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상대가 거절하는 것도 당연한 반응인데, ‘나랑 밥 먹기 싫다는 거야? 그럼, 날 안 좋아한다는 거네.’라며 단순한 ‘식사 거절’을 ‘난 네가 싫어.’로 받아들이는 거죠.     


한마디로 거절 민감성이 높은 사람은 “NO”를 “NOOOOOOOOOO!‘로 받아들입니다. 


상대의 의도를 정확하지 읽지 못하고 돋보기로 확대하는 겁니다. 그러면 안 보일 것도 보이는 법이죠.  

    

아이가 “엄마 미워. 싫어. 저리 가.”라는 말만 해도 “엄마가 싫어? 이렇게 잘해주는데 왜 싫어? 진짜 싫어?”라고 묻는 엄마를 본 적이 있었는데요. 

이 엄마는 아이의 “싫어.”라는 말보다 아이가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집요하게 아이에게 질문하며 매달리고 있었죠.      


이 엄마가 거절에 민감한 이유는 ‘유기 불안’, 즉 ‘버려짐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유치원 때 부모의 이혼으로 지적장애가 있는 할머니에게 맡겨져 오히려 자신이 할머니를 돌보며 살아야 했던 엄마는 누군가 자신을 버릴 것 같은 위기를 느끼면 과도한 불안에 사로잡혔던 겁니다.    

  

아이들은 ‘나’라는 인식을 갖기 위해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며 표현하는 연습을 합니다. 성인이 되면 여러 감정에 익숙해져서 ‘기쁘면 기쁘구나, 슬프면 슬프구나’라고 느끼는데, 아이는 태어나 처음 맛보는 감정들이 많으니 매우 강하게 정서를 접촉하게 되죠.      


아이는 ‘싫다’는 감정을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 솔직하게 자신이 느끼는 대로 표현한 건데, 엄마는 불안 돋보기를 꺼내 그 말의 숨겨진 의미를 찾습니다. 아이가 자신을 버릴 가능성이 0%라고 해도 0이라는 숫자조차 의심하죠.   

   

이때 엄마의 불안은 아이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사소하고 별 의미 없는 말조차 자신의 과거의 상처와 연결 지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습관에서 비롯된 겁니다. 


불안이 주는 위로라니, 이상하다고요?


불안은 몸의 긴장을 유발하고 약간의 흥분감도 줍니다. 불안에 빠지면 다른 건 생각하지 않게 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힐 수 있죠. 불안을 느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늘 보던 거라 익숙하고 오히려 불안하지 않는 모습이 어색해서 불편함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불안하기로 선택하는 거죠. 


남편이 회식을 할 때 전화를 해서 받지 않으면, 불안이 심해질 걸 알면서도 전화를 겁니다. 역시나 받지 않죠. 그러면 계속 전화를 하며 불안을 느낍니다. ‘그래. 불안이라도 내 옆에 있는구나.’라며 마치 중독처럼 불안한 상황에서 벗어나면 불안해지는 역설에 빠지죠.      


부모가 ‘나만 혼자 남겨질 것 같은 두려움’으로 불안을 느낀다면, 아이의 손에 불안을 건네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부모와 같이 있어도 불안을 느끼며 초조해하겠죠. 속으로 ‘아빠랑 엄마가 지금은 웃고 있지만 혹시 싸우고 나면 나를 두고 떠날지도 몰라.’라는 가시 같은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말이죠.       

         

둘째, ‘피해자’라는 역할에 익숙하면, 불안도 친근해집니다.

 

'무시당할 만하니까 무시했겠지.'      

'이용할만하니까 이용했겠지.'     

'버릴만한 하니까 버렸겠지.'


아니요!      

사람을 무시하고 이용하고 버렸다면. 이유 불물하고 그렇게 한 사람이 잘못한 겁니다.   

그런데도 불안한 사람은 잘못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모든 게 내 탓처럼 생각된다면, 나는 피해자 역할만 맡고 있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한 귀인 오류를 자주 범하는데요. 

'귀인 오류'란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의 원인과 결과를 잘못 추론하는 것을 뜻하죠.


불안한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자신의 기여는 보지 않고, 피해를 준 부분에만 집중해서 과도한 죄책감을 느끼면서 귀인 오류, 즉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잘못 연결 짓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날 무시하고 이용하며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었을 때, 그 원인이 ‘나의 책임’이라고 보는 겁니다.   

   

피해자라는 역할을 자주 맡는 사람은 ‘나는 충분하지 않아.’라는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 때로는 물질을 끊임없이 갈구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를 포함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존하게 되고, 약간의 갈등만 유발돼도 ‘내가 부족해서 사랑받지 못하는 거야.’라며 스스로 피해자라는 낙인을 찍는 거죠. 


이들은 어릴 때 부모에게 지나치게 많은 사랑을 받거나, 반대로 애정 표현이 인색한 부모에게서 자랐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을 적게 받아서 피해의식에 빠지는 건 이해가 되는데,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도 왜 결핍으로 인한 불안해하냐고요?     


과도하게 애정을 쏟으며 아이가 자신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정서적으로 미숙한 상태이니까요. 

     

아이가 가진 정원에는 적당한 비료가 필요한데 부모가 넘치게 비료를 쏟아부으니, 자아의식과 자기 확신과 자기 효능감과 자아존중감 등이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 썩고 맙니다. 아이가 불안을 느끼지 않는데 필요한 회복탄력성을 가지려면 건강한 자아감이 필요한데, 그게 결핍되니'나는 부족한 사람이야'라는 느낌이 드는 거죠. 


이러한 부모는 아이의 정원에 어느 정도의 비료가 필요한지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자신이 주는 행위에 만족합니다. 부모 역시 불안에 휩싸여 아이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거든요.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너무 많아도 또는 너무 적어도 아이의 마음 정원의 꽃은 피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키우고 가꾸고 지키는 일은 불안으로는 해낼 수 없습니다. 

준비하고 대비하고 걱정하고 긴장한다고 일어날 일이 안 일어나진 않으니까요. 

무엇보다 부모가 불안해하면 아이는 고스란히 그 불안을 건네받습니다. 


아이와 사이가 안 좋아질 수도 있고 아이가 성장할수록 분리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불안하다고 아이와 함께 패닉룸에 갇혀 살 순 없으니까요. 

          

누군가 나를 거절하거나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까 두려우세요? 


그렇다면 나는 누구에게 불안을 건네받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이의 손을 보세요. 

따스한 온기가 필요하면서도 잡아달라는 용기조차 내지 못해, 불안에 떨고 있는 아이의 손이 보인다면, 아이는 이미 불안과 친구가 된 겁니다.    

아이의 손에 건네준 불안이 사라지도록, 나의 불안의 문제를 깊이 들여다봐야 합니다. 

  

아이와 베드핏을 부르는 ‘불안’에 관한 이야기는 앞으로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게요.        


참고문헌

Downey, G., & Feldman, S. (1996). Implications of rejection sensitivity for intimate relationships. Journal of Social and Personality Psychology, 70(6), 1327-1343.


사진출처

https://www.pexe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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