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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육진심 Mar 14. 2024

저는 '원래' 불안한 사람이에요.

아이와 건강한 관계 형성의 걸림돌, 부모의 ‘근본 불안’


"저는 원래 불안한 사람이에요."      


이제 서른은 갓 넘긴 그녀는 먼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꺼냈습니다.


‘원래’ 불안한 사람이라.      


그녀가 왜 자신에게 그런 이름표를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희고 고운 얼굴에 비해 삶의 굴곡이 많은 사람 같았죠.

  

불쑥 그녀의 손목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미친개한테 물렸어요.”     


손목에는 울통 불퉁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엄마는 매일 아빠와 다퉜고 결국 집을 나갔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는 혼자서는 밥을 차려먹지 못해 배고파했고, 엄마는 술에 취해 아이를 굶겼죠.


여름 방학과 함께 무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주택 1층에 살고 있던 아이는 더운 날씨에 현관문을 열어두고 있었죠. 예전에는 그런 집들이 많았으니까요.


거리를 배회하던 큰 개가 어슬렁거리며 아이의 집에 들어온 건 배고픔에 지쳐 술에 취한 엄마를 깨우려던 순간이었습니다.


아이는 자기보다 큰 몸집의 개를 보고 뒷걸음질 쳤죠.

엄마를 불렀지만 엄마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방을 쓸 던 빗자루를 본능적으로 집어든 아이는 다가오는 개의 머리를 향해 힘껏 빗자루를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기억은 끊겼습니다.      


아이는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고 있었습니다.

의식은 희미했지만, 자신의 옆에 윗집 할머니가 있었다는 건 압니다.


다행히 아이의 비명을 들은 할머니가 뛰어와 아이를 구했던 거죠.


손목의 상처를 봉합하고 광견병 주사를 맞으면서 아이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파서가 아니었습니다.

엄마가 옆에 없다는 사실이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미친개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아이는 커가면서 손목의 흉터를 볼 때마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해서 자신을 똑 닮은 예쁜 딸을 낳았지만, 그녀는 엄마처럼 중독에 빠졌습니다.

술이 아닌 게임에 말이죠.   

   

그녀는 자신은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아이가 다른 부모를 만나는 게 행복할 거라고.      


"저는 원래 불안한 사람이에요."


그 ‘원래’라는 단어 안에 얼마나 많은 자책이 담겨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망가져있었고, 그래서 사랑을 받을 수도, 사랑을 할 수도 없다는 의미겠죠.      


‘원래’ 불안한 게 아니라, 불안하게 ‘길러진’ 겁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떡잎으로 태어나도 ‘불리한 조건’에서 자라면 될성부른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유독 사람의 자녀만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다고 하죠.

그만큼 부모를 통해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부모에게 자녀를 사랑하고 건강하게 성장시키려는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왜냐면 성장하는 동안 아이가 겪을 수많은 문제를 부모가 도우면서 함께 해결해야 하니까요.      


아이는 걸음마를 하다 넘어져서 울고

뜨거운 물에 손을 가져다 대서 울고

장난감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울고

친구가 자신과 놀지 않는다고 울고

목표대로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고 울고

자신의 꿈이 뭔지 모르겠다고 울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 울고

직장생활이 힘들다고 울고

결국 사는 게 벅차다며 울 수도 있으니까요.     


부모는 그때마다 아이의 옆에서 다독이며 위로하는 ‘좋은 마음’을 건네야 하지요.


만약 그런 부모가 있다면 아이는 ‘긍정적 조건’에서 자란 것입니다.


나약한 떡잎으로 태어났을지라도, 건강하고 푸른 나무가 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이 주어진 거죠.


물론 앞에서 말한 사례의 엄마처럼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자질을 갖고 태어났지만 부모가 아이보다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거나, 불안과 우울에 잠식되거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아이와 거리를 두거나, 지나치게 엄격해서 모든 행동을 지적하고 비판한다면, 아이는 불안한 사람으로 길러집니다.


‘원래’ 불안한 게 아니라, ‘근본 불안’ 때문입니다.      


정신분석학자인 호나이는 이렇게 ‘불리한 조건’에서 자란 아이는 부모와 ‘우리’라는 연대감을 갖지 못하고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히는 ‘근본 불안’에 시달린다고 주장합니다.      

사례의 그녀처럼 언제 미친개가 나타나 물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아무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으면, 당연히 매 순간 불안을 느끼며 살 수밖에 없는 거죠.  


‘근본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은 누군가 다가와도 의도를 의심하고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니까요.      


행여 힘센 사람이 옆에 있다면 자신을 지켜줄까 라는 희망을 걸며 매달리기도 하지만, 자신을 위해 대신 나서줄 사람은 없을 거라는 타인에 대한 불신의 끈을 놓진 않습니다.     

 

호나이는 ‘근본 불안’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때, 무조건 순응하거나, 반대로 공격하거나 아니면 냉담한 태도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설명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보이기도 하고 그 호의를 거두기도 하죠.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 자신을 맞추는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반대로 상대의 주장이 자신의 고유한 감정 및 사고와 다르면 맞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근본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게 되질 않습니다.

호나이의 말처럼 무조건 따르거나, 맞서 싸우거나, 무관심한 태도 중 하나만 고수하니까요.      


'상처 입은 관계'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겁니다.    


사례의 그녀처럼 알코올중독자인 어머니로부터 정서적 학대를 받고 자란 그녀는 ‘근본 불안’으로 인해 게임에 빠져 아이에게 무관심하며 냉담한 태도를 보입니다.      


학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도망친 한 여성은 아버지보다 더 폭력적인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나르시시스트였던 어머니로 인해 정서적 학대를 받은 남성은 자신의 어머니처럼 간섭과 통제가 심한 아내를 만나기도 합니다.      


학대를 당하는 사람은 무조건 상대에게 순응하는 사람이고, 학대를 하는 사람은 무조건 상대를 공격하는 사람이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은 무조건 상대에게 냉담한 사람인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망가져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들은 '근본 불안'으로 인해 두렵고 무서운 채로 성장이 멈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태어나 처음 만나는 사람인 부모에게 큰 굴욕을 당했을 것입니다.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너 때문에 내 인생은 망했어.

너는 정말 정이 안 가는 애야.

너를 두고 도망가고 싶어.

너만 없으면 살 것 같아.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고 싶은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면, 누구나 '불안한 사람'이 됩니다.

     

‘근본 불안’이 왜 그렇게 어둡고 강력한 힘을 갖는지 아시겠죠?     


'근본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애정이 무언지도 모릅니다.


폭력을 당하면서도 상대에게 매달리고, 쓰러져가는 상대를 보면서도 때리는 걸 멈추지 않는 건, 그들의 내면엔 지독한 '수치심과 자기혐오, 분노와 슬픔, 우울과 불안'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알면 그들에 대한 시선이 변화합니다.     


위선과 독선, 회피와 적대감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서 그 안의 ‘근본 불안’을 보게 되니까요.    

  

‘아마 어린 시절 당신의 매일은 참 힘들었겠군요.’라는 이해의 지평이 열리는 거죠.     

 

부모의 ‘근본 불안’은 아이와의 관계를 방해하고 가로막는 중요한 원인입니다.

하지만 내가 만약 불안한 사람이라면 ‘원래’ 불안한 게 아니라, '불안하게 길러진' 걸지도 모릅니다.


그 말은, 나는 다시 '불안하지 않는 사람'으로 길러질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를 양육하는 일은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 고되고 지난한 과정입니다.


그래도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사랑과 관심을 내가 나에게 줌으로써
‘근본 불안’에서 벗어나,
아이에게 내가 꿈꾸던 그 애정과 이해를 줄 수 있다면,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하지 않을까요?    
 


    

참고문헌

Horney, K. (2015). 내가 나를 치유한다.(서상복 역). 경기: 연암서가.


사진출처

https://www.pexe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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