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지쳐 도망친 하루,
뜻밖의 완벽함

어김없이 바쁘고 정신없이 흘러가는 하루들 속에서, 오늘은 조금 별나게 보낸 여느 금요일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아침에 급하게 학원 조교 일을 마무리하고 기타 레슨을 다녀오니 낮 햇살이 쨍쨍한데 바람은 산들산들 불고 있더라. 다시 책상에 앉으려다 문득 거울 속 내가 너무 지쳐 보였다. 아, 오늘은 그냥 안 되겠다 싶어 노트북이랑 자료를 가방에 던져 넣고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평소 잘 입지 않는 원피스를 꺼내 입고, 됴각.됴각. 구두를 신발장 깊숙이에서 꺼내 신었다. 머리도 단단히 묶고 최애 향수를 아낌없이 뿌린 뒤, 목적지 없이 무작정 집을 나섰다.


일상에서 잘 타지 않는 경의중앙선을 타고 싶어졌다. 회기역을 두 번이나 지나치는 평소 같으면 *욕이 나왔을 배차 간격에도, “오늘은 그냥 백수 컨셉이다” 하며 여유롭게 플레이리스트를 다 듣고 드디어 지하철에 올랐다. 수인분당선을 갈아타고 선릉에 도착하니, 눈앞에 펼쳐진 건 공휴일의 테헤란로였다. 늘 빠듯하게만 느껴지던 거리였는데 그날은 유난히 맑고 빛났다. 개방감이 필요했던 나는 대형 카페를 찾아 들어갔고, 햇살이 쏟아지는 자리에 앉아 밀린 일을 세 시간 만에 후다닥 처리했다.


일을 끝내자마자 다시 여정을 시작했다. 노을이 내려앉는 거리를, 차들이 씽씽 달리고 무표정한 사람들과 행복한 커플이 오가는 길을 정처 없이 걸었다. 마치 큰 전시회의 프레임 속을 내가 혼자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발이 아파올 무렵, 내가 좋아하는 바 근처에 도착했다. 기본 안주로 크림브륄레를 내주고, 칵테일과 위스키 추천을 잘해주는 곳. 오늘은 거길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물이 보고 싶어졌다. 바다는 갈 시간이 안 되니 대신 한강을 보자 싶었다. 전에 가본 적 있던 한강뷰 바가 떠올라 바로 택시를 잡았다. 도착하니 다들 커플 단위로 앉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오늘은 혼자 오고 싶었던 날이니까. 위스키 한 잔만 마시려 했는데, 너무 많이 걸어서 배가 고팠다. “오늘은 금융치료다!” 선언하며 스테이크를 시켰다. 직원에게 칵테일 추천을 부탁했더니 도수를 높여 만들어주겠다고 하셨다. 작전 성공. 가니시는 한식 퓨전으로 나왔고, 도수 높은 칵테일은 스테이크와 정말 잘 어울렸다.


잔이 비었는데 음식이 남아 고민하다 탈리스커를 한 잔 더 주문했다. 나는 온더락보단 니트를 선호하는데 직원이 신기했던지 재차 물어보시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향을 맡으며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옆 테이블 커플들이 하나둘 떠나갔고, 그제야 음악이 제대로 들리고 물 위에 빛이 일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을 붙잡고 싶어 있는 힘껏 멍하게 야경을 마음에 가득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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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바텐더가 테이블에 위스키 한 잔을 올려놓았다. 주문하지 않은 술이라 당황했는데, 서비스로 내어주신 스페이번 15년이었다. “탈리스커보단 타격감이 약하지만 마무리하시라고 드립니다.”

의아하게 한 입 머금은 위스키는 타격감이 약한 것부터 강한 걸로 가야 한다는 내 편견을 와장창 깨주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시작된 한강뷰 감상 타임.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며 바텐더와 짧은 스몰토크를 나누고 바를 나섰다.


택시를 타려다 반포 한강공원 야경이 나를 끌어당겼다. 두 시간 동안 벤치에 앉았다가 걸었다가, 사람들을 구경하며 홀린 듯 떠돌았다.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진짜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 택시에 몸을 실었다.


시간도 돈도 많이 쓴 하루였지만, 그 어느 날보다 많은 걸 얻었다. 내 안을 들여다보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시 확인하고, 그냥 살아 있음에 감사할 수 있었던 날이었다. 이 날을 기점으로 며칠 후 나는 스타트업에 정식으로 주 5일 출근을 시작했다. 더 바쁘고 고된 일상이 기다리고 있지만, 이 별난 하루를 기억하면서 또 한 주, 또 앞으로를 힘내서 살아가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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