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내 첫 발령부서 사수였다. 어딜 가나 있는 아랫사람은 철저하게 이용하고 윗사람에게는 철저하게 충성하는 류의 인간이다. 나는 많은 동기들 중에서 그 인간에게 '간택'되어서 픽업되었다는 걸 첫 주쯤 지나고서 알았다.
당시 그는 일터에서 자신을 마모시켜가며 착취하고 빌어먹으며 쌓아오던 모든 것을 주식으로 잃은 상태였다. 레버리지를 일으켜서 허상 뿐인 회사의 욕망으로 지탱되어가던 종목의 고점에 모든 어리석음과 탐욕과 무지를 담아 자신의 것 그 이상을 배팅했고 그것은 휴짓조각으로 사라져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사정을 숨기고 혼자 신경정신과에서 공황제 약을 타먹으며 일터에서 그 독기로 잃은 것을 멘징하려고 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근속 중인 이 회사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만하지만 정말 솔직하게 입사 공채 같은 건 공부도 안했고 애초에 입사 자체가 부모의 강권에 의한 것이어서 여기서 어떤 영달을 꽤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걸 참고 나는 일단 다녀야 하는 상태였고 뱀 눈깔을 가진 K는 이제와 보니 그걸 동물적으로 느끼고 이용했던 것 같다.
어처구니없이 그가 하는 윗사람에게 잘보이기 위해 하는 모든 일에 나의 모든 능력과 역량과 시간과 에너지를 신규를 잘 돌본다는 미명 아래에 착취당했다. 당시에 나는 천지분간 못하는 이방인으로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지 못하고 끌려다녔다. 나는 놀라울 정도로 연기를 잘해 그런 부당함을 나도모르게 감추고 삭여내며 다녔다.
부친의 숨막히는 기억력을 이어받아 나는 나름 실록 같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때는 그저 삭혀버린 기억들이 떠오르고 나는 이제 잔뼈가 굵은 인간으로서 모든 사건들을 재평가하고 일종의 재심을 진행한다. 대부분의 무죄나 유예 평결이 뒤집어지고 혐오가 되쌓인다. 이미 연락을 끊었고 간간이 내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도 앞으로 전혀 하지 말 것을 얘기했고, 그가 쌓아온 라인에 속하지 않는다고 입으로 명시적으로 말을 하고는 그뒤로는 연락하는 법이 없다. 서로 다른 부서 사람이 되고서 왜 그는 나에게 굽신거리는 스탠스가 되었는지 처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아, 주식. K가 불같이 화냈을 때 중 하나가 기억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규 직원에 대한 치밀한 가스라이팅. 사소한 것 하나하나 판단을 유보하고 질문하게 했지. 그것 중 하나였을 건데, 그 묻는 타이밍에 자신의 주식 매매가 어긋났다고 수천만원이 날라갔다고 화를 내는 그 뱀 눈깔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말아먹은 뒤에도 그는 도박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해 정선 카지노에서 무료 급식으로 연명하는 류의 사람들처럼 주식장에 죽치고 얼마 남지 않은 돈과 부정하게 모은 돈들로 여전히 투자가 아닌 투기를 하면서 조그맣게 사무실 모니터 하단에 주식 창을 켜놓고 무언가에 골몰하곤 했다. 출장을 함께 나와서도 작전주나 테마주의 병자처럼 발작하는 호가창을 초단위로 보며 무언가를 하더랬지. 사실 그 순간이 아무것도 모르고 첫 사수에게 부사수로서 좋게 가려던 내 의문의 시작점이었을 것이다. 아, 이건 좀 잘못되었다는 생각. 그리고 어긋나는 상호작용이나 대화. 서로 다른 언어를 이야기 하고 있었던 것. 나의 이해를 그가 따라오지 못해서 발생한 수많은 어그러짐.
어쨌건 인사가 나서 헤어지기 전까지, 그리고 이후로 내가 재심 평가를 통해 명시적으로 관계의 종료를 선언하기 전까지는 잘 지냈다. 그리고 나는 그와는 다르게 투자로 만족할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투기가 아닌 투자를 한다. 세상에 대한 나의 지식과 직관을 동원한다. 그가 잃은 돈들이 나에게 들어온 것처럼 느껴진다.
나도 연륜이라는 게 생기고 주관이라는 것이 생겨서 이제는 조직에서 대강의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한 뒤로는 솔직히 오만 방자한 미친 개 정도 포지션으로 대한다. 내가 건너 듣기로 이제 K는 나를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아래 사람들을 착취하고 위에는 간사하게 지내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공허함을 느끼는 듯하다고 세작을 자칭하거나 참칭하는 자들이 나에게 알려온다.
사실 나는 K보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우수한 사람이어서, 재심에 임하는 판사나 변호사가 의뢰인이나 피심문인에 대하는 관심 이상으로는 별로 상념 같은 건 없다. 일정 금액이 모이면 나는 이곳을 떠나고 부모를 떠나서 내가 하고 싶은 돈 안되는 일을 할 것이다. 아, 미래의 착취당할 K의 아랫사람을 위해서 인류애적으로 그를 참수하고 나갈 생각은 없지않아 있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