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판 파스타 소스의 유리용기를 마지막에 사용하는 순간은 참으로 아름다운 순간이다. 점액질의 소스가 남았다고 해도 간단히 소량의 물을 넣고 뚜껑을 돌려서 닫고 흔들어서 파스타를 조리중인 팬에 무심한듯 넣는다.
그리고 투명한 유리용기는 본연의 임무를 완수했고 물을 넣어 흔들어 넣는 기교를 선보인 나에게 칭찬하듯 빛난다. 발우공양을 하는 수도승도 나에게 미소지을 것이며 극렬 환경보호운동가들도 나에게 찬사까진 아니더라도 격려를 해올 것이다. 파스타 팬 쪽에서도 유화작용이라던지 각기 재료들이 서로의 몸에서 나온 육수를 다시 받아들이는 귀중한 시간을 그 물의 양만큼 추가하고 기쁜듯이 바갈거린다. 아, 이탈리아여 영원하라,아니, 식품공학자들과 고도 자본주의사회의 식품 회사여, 후대까지 번성하라!
고대부터 행인이나 방랑자의 소지품이나 금품을 노린 강도 살인이나, 집에 침입해 집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고 귀중품이나 식량이나 가축 같은 것들을 갈취하는 것은 나름의 유구한 전통이었는데 그것은 이제 최소한 우리 나라 같은 제1세계에는 절멸된 이그러진 풍습이 아닐까.
무작위로 시청로든 돌담길이든 서빙고 인근이든 길 가는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거기서 가장 귀중한 것이야 휴대폰과 플라스틱 카드 쪼가리밖에 더 없을 텐데, 쾌락살인이거나 원한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면야 그걸 얻자고 사람을 죽이기에는 행위와 결과에 대한 보상의 평형이 완전히 무너져내렸기 때문이겠지. 가택침입도 마찬가지다.
금송아지나 금거북이를 목장의 소나 자연보호구역 연안의 거북이 수만큼이나 집에 숨겨놨을 집을 찾느니 로또복권을 '연구'(물론 나는 그게 연구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하는 게 더 나을 거니까. 이 두 유형의 범죄는 적어도 여기선 절멸되어가는 것 같다.
꿈에 유년기를 보냈던 동네가 나와서 혼자 주말에 다녀왔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꿈에 동네가 나와서 다녀왔다. 이 행위넨 어떤 정서나 계시도 들어있지 않다. 실재적인 것은 거기에 소모된 일정량의 가솔린일 뿐이다. 역시 도착해서 내가 적확하게 무언가를 한건 아니고 그저 주차하고 생각나는 거리들을 걷고 유의하고 있던 건물들과 가게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거리의 사람들을 멍하니 구경하거나 멀거니 쳐다보고 돌아왔다.
시간의 물결에 의해 다소 이지러진 감이 있었으나 몇 곳은 경도와 강도가 그 동네의 다른 부분들과는 다른 점을 끝내 증명한다는 양 굳건히 남아있기도 했다. 그곳은 빈곤한 지역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우리 부모님은 그곳에서 사는 것이 당신들에게 부당하다고 느꼈던 것 같고, 열과 성을 다해 치부한 뒤로는 곧장 그곳을 떠났다.
그런 묵시적인 무의식이 집에서 호흡하는 내 콧구멍과 입속에도 스며들어와, 어렴풋한 기억 속에 나는 유목민 부모를 따라 어떤 초목지에 잠깐 있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그걸 새삼 느꼈다. 나는 이내 나의 말로 돌아가 시동을 켜고 나의 게르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