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란이 아닌 무정란으로, 또 부화되지 않고 섭식되는 것이, 거기에다 온전히 섭식되지 않는 흰자와 노른자가 얼마나 가여운가. 흰자에서 병아리가 생기고 병아리가 되기 전까지 노른자의 양분을 먹는다. 그런 연유로 흰자는 노른자를 감싼 모양으로써 달걀로 존재한다.
다방에서 쌍화차 위에 노른자만 올릴 떄, 또 각종 파스타를 만들 때는 노른자만을 간악하게 분리해내 사용하면 흰자는 어디로 보통 갈까. 열을 가하기 전에 점액질인 계란은 하수구에 흘려보내기도 쉬워 부유하지 않은 파스타 제조자나 시골의 남루한 다방 주인이라도 모른채 그것을 흘려보내기도 쉬울 것이다. 반대로 머랭을 만들거나 유별난 보디빌더가 흰자만을 사용하고자 할 때 노른자는 어디로 가야 하나.
청교도보다도 청빈한 수도자 같은 보디빌더에게 노른자는 과영양을 포함한 과욕과 부덕의 소치로 박해의 대상이 될 것이며, 힘들여 흰자로 머랭 거품을 내고 피곤한 제빵자가 노른자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아, 이따금 나는 어떤 쪽으로든 남겨진 흰자와 노른자가 가엽다.
나는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읽고, 쓰고 달린다. 나는 어떤 기능적 목적이 유효한지 무효한지도 모르는 복잡한 기계 장치의 안정적인 작동을 위해 중복적으로 설계된 여러개의 병렬 기관들을 잇는 불필요하게 많은 여러개의 이음매 중 하나를 구성하는 구리 합금 핀 정도의 일을 하고 있다. 이 비유도 사실은 거창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일을 하다가는 나를 잃어버리기가 쉽다. 구리 합금 핀에게 어떤 확고하고 특별하고 대체불가능한 자아가 존재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런 게 존재한다면 그것대로 문제가 된다. 어쨌든 나는 나를 잃어버릴 수 있는 합금 핀 정도의 일을 하고 그만큼의 돈을 번다. 그래서 이 바닥의 대부분은 보통은 이미 자신을 잃었다. 그래서 그들은 막연한 불안감에 거짓 신을 섬기고 그릇된 규칙에 순종하고 대오에서 떨어져나가는 합금 핀에게 조소의 쇳가루를 날리며 상대적으로 견고한 본인의 합금 핀에 안심한다. 나는 그러지 않기 위해 읽고, 쓰고, 달린다.
읽으면서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세계의 다른 규범을 접하며 나의 규범과 나의 세계를 상대적으로 점검하고 보완하고 상실된 부분을 채운다. 쓰면서 나의 세계를 언어로 상대화하고 다시 꼼꼼히 살피고 왜곡되고 훼손된 부분을 다듬는다. 달리면서 스마트폰이든 컴퓨터건 성가신 누군가의 연락이든 모든 자극을 없애고 뛰는 나 자신과 면밀하게 토의한다.
유명 러시아 방송작가가 그랬나, 우리는 아이의 테러행위를 당연시하고 우리는 그 포로다, 라고. 부모가 자기 자녀의 포로가 되는 건 내 알 바 아니다. 그리고 서로 테러행위를 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아이가 타인에게 행하는 테러행위를 당연시하고 내가 그 포로가 되는 건 맞지 않는 일이다. 출생아가 적다고 나라 걱정 하는 자신을 보며 보통은 우국지사 같은 충만한 감정들을 느끼지만 나는 그렇게 애국적인 사람이 아니다.
플랫폼처럼 나라는 언제든지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 모두가 우국지사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본인 아이들을 앞세워 차 뒷면을 덕지덕지 붙이고 공공장소에서 불편을 끼치고 오만 군데서 자발적인 선의가 아닌 일등 시민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처럼 특혜를 요구하는 건 타인들을 본인의 자식들의 포로로 만드는 것이다. 유전자에 의해서 당연히 자기 유전자를 지닌 개체를 애호하고 위하는 본능만으로 세상을 살기가 한결 편해진 세상이다. 그러나 내가 그에 대한 포로가 되는 건 단호히 거부한다. 위선적인 너희들이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