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걸음
집에 가던 날 정유성이 전화를 끊고 말했다.
“야, 너 나랑 우리 아빠 차 타고 올라 갈래?”
마침 근처에서 서울로 가는 중이라 우리를 데려가는 정유성네 아빠를 기다렸다.
어떤 차일까? 우리 엄마의 제네시스를 떠올리는 순간 검은 때가 잔뜩 묻은 찌들고 녹슬고 험악한 흰색 트럭이 도로를 간지나게 제껴돌더니 우리 앞에 섰다. 화물칸에 주황색 고물 자루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많은 짐을 싣고 가는 화물차는 본 적이 없다.
운전석 문이 열리며 향수 화보에나 있어야 할 것 같은 꽃미남 오빠가 양팔에 때 묻은 토시를 두르고 나왔다. 화물칸으로 향하며 구수한 사투리로 우리에게 말했다.
“타라!”
“너네 형이야?”
내가 물었다.
“아니. 아빠.”
“이십 대 같은데? 몇 살이신데?”
“서른여섯.”
“…아빠치고 젊은데?”
“열아홉 살에 사고쳐서.”
몸집이 작은 내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앉았다. 차 안에 쿠쿠하고 구리구리한 고물 냄새가 진동했다. 정유성 아빠가 돌아와 문을 열고 운전석으로 풀쩍 올라앉았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턱을 까딱하며 시동을 걸었다. 차가 출발하자 아저씨가 말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싸댕기기만 하고 처자빠져 놀기나 해라.”
누아르 영화 조폭1 같은 동굴목소리였다. 정유성은 못 들은 척 핸드폰을 만지며 딴청을 피웠다.
“니는 아가 와 자라다 말았노?”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주디 본드 붙였나? 와 말을 안 하노.”
물어본지 삼 초도 안 지났는데.
“아, 저 원래 키가 좀 작…”
“얘 원래 느려.”
“니는 새꺄 한 시간이라도 썩을 놈의 핸드폰 좀 에지간히 쳐다봐라!”
아저씨가 오른팔을 뻗어 정유성 이마를 손바닥으로 쳤다.
“아! 아프다고!”
“아직도 현수 그노마랑 붙어댕기나? 속 쫌 그만 쎅이라!”
차 안에서 코끼리 두 마리가 울부짖는 것 같았다. 정유성이 날 놓아줬다.
“아빠 경상도 분이셔?”
내가 물었다.
“어, 거제도. 근데 말 겁나 많지, 거제도 아저씨들 말 없는데.”
“에이, 사람마다 다르지.”
“삼십아, 여기 사람같은건 니캉 나밖에 없다.”
아저씨 말에 정유성이 물었다.
“난 뭔데?”
“니가 사람이가? 짐승새끼지! 묵고 자고 싸고 처놀고!”
아저씨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한 손으로 정유성 머리를 잡고 소리를 질렀다. 정유성이 질세라 비명을 질렀다. 트럭이 급정거했다가 달렸다가 급정거했다. 난 그 시절에 육십 평짜리 아파트에서 적막한 시계 소리만 들으며 말을 한 번에 두 마디 이상 하는 법이 없는 엄마와 살고 있었다. 정신이 빠져나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에서 깼을때 차는 서울의 한 다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지금 몇 시에요?”
“열 시 칠 분.”
조용한 차 안에서 아저씨가 말했다. 정유성이 눈을 떴다.
“아빠, 여기 어디야?”
“오금교.”
“다 왔네. 좀만 더 가면 백삼십 집이다.”
정유성 어깨에 내 머리를 놓고 그 위에 정유성이 자기 머리를 놓았다. 눈을 꿈벅이며 밖을 봤다. 깜깜한 사방에 도로 가장자리로 하얀 가로등 불빛이 늘어서 있었다. 멀리 앞서가는 차들의 빨간 전후등이 반짝였다. 시속 팔십 킬로미터로 빠르게 달려 전부 열려진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쏴아아 들어왔다. 꾸벅꾸벅 졸면서 정유성이 중얼거리듯 늘어지게 말한 소리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집 가면 문자해……
연신 덜컹이며 빠르게 도로를 가르는 트럭 안 정유성에게서 나는 은은한 냄새를 맡으며 졸았다. 펼쳐진 까만 도로와 늘어선 하얀 가로등이 옆으로 솨아악 기우는 것 같이 보였다.
“여기 지금 2학년 형 누나들 놀고있는데 너 데려오면 우리 보내주겠대.”
난 이지형이 오라고 한 112동 903호 앞에 섰다. 문을 열자 시끄러운 소리가 비져나왔다.
“어, 왔다. 야! 왔다.”
“뭐? 걔 왔어? 어, 왔다.”
넓은 거실에 낯익은 우리 학교 얼굴들이 긴 좌식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일동 시선이 내게 꽂혔다.
“아, 얘야?”
“쟤라고?”
“야, 됐어. 너 가도 돼.”
이지형과 표현수는 약속이 있다며 냅다 가버렸다. “유성이한테 비밀로 해주라.”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야, 은오야. 정유성 불러봐.”
“걔 지금 바빠요.”
에이씨, 하고 실망한 반응이 돌아왔다. 슬쩍 가려고 일어날 때 한 오빠가 말했다.
“유성이 여친아, 부엌 가서 포도주스 좀.”
“쟤 와인이랑 헷갈리는거 아니겠지? 우리 엄마 와인 담근거 냉장고에 있는데.”
보라색 액체가 가득 담긴 똑같은 페트병이 냉장고 문칸에 빽빽히 서있었다.
“저, 주스가 안 보여요.”
“병에 써있어!”
“잘 모르겠어요.”
휘갈긴 글씨들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먹어보면 될 거 아냐!”
하나씩 뚜껑을 열고 조금씩 따라 먹어봤다.
“왜 이렇게 많아?”
페트병이 냉장고 가득 수없이 쌓여있었다. 어질어질하고 점점 그 맛이 그 맛이었다. 결국 아무 페트병을 하나 집어들고 거실로 갔다.
“야! 그거 와인이야. 아 맞다, 너 쟤한테 포도주스 가져오라고 시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집주인인 듯한 오빠가 일어나서 페트병을 빼앗고 부엌으로 갔다.
“야, 야, 개웃기네. 쟤 취했다.”
“미친.”
다 배꼽 잡고 웃었다.
“야, 포도주스 없었네. 나도 와인 때문에 주스 있다고 착각했나봐.”
돌아온 집주인 오빠가 말했다.
“미친. 야, 니 대체 얼마나 마신거냐.”
토할 것 같아 머리를 부여잡고 문지방에 앉는 날 보며 다 숨이 넘어가라 웃었다.
“지원이가 잘못했네~!”
“아, 나도 몰랐어!”
“뭔 집에 와인이 얼마나 많길래 저러는데?”
“울 엄마 그거 인터넷에 팔아. 야! 너 입 대고 마신 거 아니지?”
난 고개를 저었다.
“여보세요? 야, 정유성.”
한 언니가 전화에 대고 말했다.
“니 여친 술 먹고 뻗었다. 싫은데? 안 말해줄건데? 야, 은오야. 니 남친이 너 바꾸래.”
난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술은 왜 처먹냐?”
정유성이 한심하다는듯 말했다.
“니 안 오면 얘 안 보냄.”
언니가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십 분쯤 후 누가 현관문을 쾅쾅 두들겼다.
“어? 야, 정유성 왔나보다.”
“헐! 대박. 진짜로?”
여럿이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시끌거렸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