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점 Oct 12. 2023

첫사랑에게 걸어갔다. Andante

다섯 걸음



 이지형, 표현수, 박서환, 정유성, 나, 김세훈, 홍재완이 양천구청역 앞에서 만났다. 박서환을 보며 정유성이 표현수에게 말했다.


 “야, 저 형 왜 데리고 왔냐고?”


 “아 몰라 지가 온대.”


 “쟤 소문 더럽잖아.”


 정유성은 표현수를 흘기곤 내 옷차림을 봤다.


 “야야, 너 그런 스타일 잘 어울릴거 같다.” 


 정유성이 눈을 찌푸리고 허공에 손가락을 허우적거렸다. 


 “봐봐, 검정 플레어 미디 스커트에…까만 앙고라 목티 입고 연두색 빈티지 자켓 걸치는거지. 신발은 하루타 로퍼.” 


 “뭔 소린지 모르겠어. 겨울 옷 아냐?”


 “겨울에 만날 때 입고 와. 어?”


 “그래.” 그러고보니 그 약속을 못 지켰다. 


 양평에 있었던 김세훈 할머니댁은 문만 현대식인 한옥집이었다. 마당 가장자리엔 장독대들이 있고 오른쪽에 평상이 있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전부 나가고 방엔 나 혼자였다. 옆방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어 문을 열고 누가 나왔다. 


 “어디 가?” 


 내가 나와 물었다.


 “편의점.” 


 이지형이 신발을 신었다.


 “나도 같이 갈래.”


 말하는 내 얼굴 앞으로 정유성이 문을 콩 닫았다. 발소리가 멀어져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리고 박서환이 눈웃음을 지으며 들어왔다.


 “안녕.”


 “어어, 안녕하세요.” 


 난 어색하게 웃었다.


 “뭐해? 책 읽어?”


 바닥에 놓인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보고 물었다.


 “네.”


 “재미있어?”


 “네. 근데 슬퍼요.”


 “왜?”


 “여자가 어릴때부터 좋아한 남자를 두고 다른 남자랑 결혼해서.”


 박서환이 푸하하하 비웃자 내 얼굴이 빨개졌다. 전화번호도 교환하고 시시콜콜한 얘기를 이어가며 친해졌다. 박서환이 웃다가 말했다. 


 “우리 유성이 놀래킬까?”


 “오, 재밌겠다. 좋아요.”


 “질투나게 해볼래? 이따가 부루마블할때 내가 너 빤히 쳐다보고 붙어서 귓속말해줄게.”


 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때 우리가 있는 방문 앞 마루에서 이지형이 “왔어?”라고 하며 일어났다.


 “뭐 사왔어?” 


 김세훈이 물으며 이지형 옆에서 일어났다. 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정유성이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마루로 올라와 날 향해 두 팔을 활짝 펴다가 말고 소매에 묻은 빗물을 털었다. 내 뒤로 박서환이 나왔다. 정유성이 고개를 확 들더니 우리를 번갈아 봤다.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은오야, 부루마블 할 줄 알아?”


 미나가 방 안에서 물었다. 이지형이 미나 옆에 앉았다.


 “하다 보면 생각날 거 같아.” 


 빈 자리인 이지형 옆으로 다가갔다.


 “너 잔다며, 아까. 왜 말 바꿔.” 


 정유성이 내 목 소매를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왜? 같이 해. 많을수록 재밌잖아. 야, 김은오. 이런 데 왔을 땐 밤새는 거임.” 


 “맞아.”


 이지형에게 맞장구치며 앉으려던 자리로 가자 정유성이 날 잡아 밀고 옆방으로 갔다. 이불장을 열고 이불을 꺼내 깔며 말했다.


 “그냥 처자.”


 “편의점도 같이 가기 싫어해, 게임도 같이하기 싫어해. 왜 그래?”


 어깨를 으쓱하며 날 떠밀어 이불 속에 구겨 넣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씌우고 키득거리며 나갔다. 새우 자세를 하고 고요와 어둠을 느끼는데 이불이 홱 뒤집혔다. 정유성이 얼굴을 확 들이댔다.


 “너 아까 박서환이랑 여기서 뭔 얘기했냐?”


 난 눈을 크게 뜨고 벌렁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깜, 깜짝이야. 깜짝…”


 “뭔 얘기했냐고?” 


 날 살짝 흔들며 되물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정유성이 왼팔은 바닥을 짚고 오른손으론 이불을 걷고 위에서 내 얼굴을 가까이 마주 봤다. 


 “아무 얘기 안 했어.” 


 “아무 얘기 뭔 얘기?”


 물으며 이불을 잡던 손을 땅에 짚었다.


 “너거들 거서 둘이 뭐하노?”


 할머니가 방문을 열어젖히며 문 앞 마루에 앉았다. 우린 얼굴이 빨개졌다. 내가 정유성에게 대답했다.


 “그냥 뭐 뭔 책 읽냐, 너랑 어떻게 만났냐, 그러던데.”


 가만히 내 눈을 뚫어지게 말없이 쳐다보다가 표정을 반전해 눈웃음을 가득 지었다.


 “알았어.” 


 “나온나!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네.”


 정유성이 할머니에게 대답하고 내게서 떨어졌다. 날 이불로 눌러 덮고 베개로 얼굴을 꽉꽉 누른 후 나가며 말했다.


 “나오면 죽는다.”


 어차피 나갈 생각 없었다. 한참 후 문 두드리는 소리에 선잠에서 깼다. 문이 열리고 얼굴이 빼꼼 나타났다.


 “은오야, 자?” 


 미나가 내 앞에 와 앉았다. 나도 일어나 앉았다. 


 “아니. 왜?”


 “야, 그거 진짜야?”


 “뭐가?”


 “박서환 오빠랑 너랑 짜고 정유성 속이기로 했다며.”


 “누가 그래?”


 “걔가. 박서환이. 진짜야?”


 문이 열리고 어둑한 방에 누가 또 들어왔다. 미나가 돌아보더니 일어나 나갔다.


 “너 내가 호구 같지?” 


 정유성이 빨간 눈으로 울먹였다. 


 “박서환이랑 짜고 치고 나 엿 먹이려고 했다며?”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크게 뜬 정유성 눈에 눈물이 가득 차 망울거렸다. 정유성이 쪼그려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어깨를 동그랗게 말았다.


 “지형이랑 세훈이가 너가 좋다고 하는거 들었다는데.”


 “뭐라고? 좀 천천히 말해봐.” 


 정유성은 기가 막히다는듯 숨을 허, 뱉더니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난 혼자 한동안 당황과 흥분에 뒤섞였다. 했어야 할 말들이 그제서야 똑 부러지게 생각났다. 씩씩대며 이불을 개고 집에 갈 채비를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나갔다. 


 “백삼십!”


 얼마 후 내 뒤 멀찌감치에서 소리가 들렸다. 못 들은 척했다. 백삼십, 백삼십, 백삼십, 점점 크게 반복됐다.


 “야! 아, 좀!” 


 바로 뒤에서 소리가 들리며 가방이 잡혔다. 정유성이 헉헉대며 울고 있었다.


 “아, 미안하다고! 내가 미안하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 쳐다봤다. 마주 서서 한동안 질질 짜다가 내가 말했다.


 “그 오빠가 너 놀래키자길래 장난인 줄 알고 좋다고 했어. 딱 그거뿐이었어.” 


 “알았어, 알았어.” 


 정유성이 소매로 콧물을 닦으며 가방을 들고 되돌아갔다. 난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한참 말없이 걷기만 하다가 내가 배스킨라빈스를 가리켰다.


 “우리 저거 먹고 가자.” 


 모퉁이를 돌아야 계산대가 있는 구조였다. 구석에 파인트 아이스크림을 놓고 앉았다. 이따금씩 훌쩍이며 말없이 먹기만 했다. 


 고개를 들어 슬쩍 정유성을 봤는데 눈이 마주쳤다. 삼 초쯤 마주 보다가 히히 웃었다. 이어 낄낄 웃었다. 둘 다 상체가 기울여져있어 가까이 마주 본 채 미친 애들처럼 낄낄거렸다. 이유 없이 웃겼다. 신나게 웃다가 정유성이 말했다.


 “아이스크림 먹다가 키스해봤냐?”


 “아니.”


 “나랑 하자.”


 가까워지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내 첫키스는 열일곱, 사랑에 빠진 딸기였다.                                                                                                                                                           


작가의 이전글 첫사랑에게 걸어갔다. Andant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