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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점 Aug 21. 2023

내 첫사랑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이었다

키스 바이러스

 사귀고 처음 만난 날, 오지 않는 그를 남부터미널에서 한 시간 동안 기다렸던 건 차가 엄청 막혔기 때문이었다. 여의도에서 열린 불꽃축제에 백만 명이 몰렸었다. 사람들이 어찌나 새치기를 하던지.  


 “왜 저래, 진짜. 우리가 먼저 왔는데.”


 내가 한숨을 쉬었다.  


 “가자.”


 배려해 주고 내가 기다리고 마려는 나와 달리 그는 들어가려 했다.


 “그냥 우리가 기다리자.”


 “우리를 먼저 생각해야지.” 그가 단호하게 주장했다.


 “보내줘, 그냥.”


 “야, 우리가 먼저 살고 봐야 할 거 아니야?” 답답했는지 따지고 들었다.


 “싸움 나.”


 “지들이 잘못했는데 싸우는 게 당연하지.”


 “그럼 넌 가. 난 기다릴 테니까.”

 첫 싸움이었다.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말다툼을 이어갔다.

 

 “그리고 너 왜 나한테 반말해? 나 너보다 네 살이나 많아.”


 별 걸 다 안다는 생각에 기가 막혀 웃었다. 그럼 뭐라고 부르냐는 내 말에 오빠라고 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 외국인한텐 오빠라고 안 해.”


 “여기 한국인데. 너 한국인 아니야?”


 사귀는 4년 내내 난 언제나 ‘당신’이란 호칭으로 타협했다. 기분 좋을 때나 장난스레 부를 때만 오빠라고 했다.


 그날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역 하나가 통제되어 다른 역까지 걸어가야 했을 정도였다. 여의나루 역에서 여의도 역까지 걸어갔던 것 같다.  


 우린 화해했고 안양에 있는 호텔에서 외박을 해야 했다. 전주와 안양이란 장거리 때문이었다.

 

 그 이후에 심하게 아팠다. 열이 몇 주간 펄펄 끓는데도 그를 만나러 전주로 갔다.


 무궁화 호를 타고 전주로 갈 때 그가 다니는 대학교가 눈에 들어오면 전주가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학교 건물이 정말 컸다.
 


 

 그가 전주버스터미널로 날 데리러 차를 끌고 왔다. 외국인이니 새 차가 아닌 중고차였는데 차 뒷유리에 중고차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여있던 게 어찌나 창피하던지. 사람들이 다 우리만 보는 것 같았다.  

 

“돼지국밥. 돼지국밥 진짜 먹고 싶었어. 여기 전주에 진짜 유명한 데 있대.”


 차에서 내가 말하자 그가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4년 간 연애하며 힘들었던 점 중 성격, 나라, 문화 차이를 다 누르는 하나가 있다. 살면서 먹는 낙처럼 사람을 기운 차리게 하는 게 별로 없다고 본다.  

 

 그는 돼지를 못 먹었다. 처음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문제가 얼마나 날 힘들게 했는지 아마 그는 모르겠지.

 

 글을 쓰다가 갈비탕이 아주 주식이었다고 연락을 했더니 3번 먹었다며 눈을 흘기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아, 그 돼지국밥집 진짜 가보고 싶었는데.

 

 “집에 가고 싶어?”
 

 내가 물었다. 유튜브 보면 한국 와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찬양하며 눌러 살 거라는 외국인들 천지길래 궁금했다. 그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인들 어때?”

 

 “완전 싫어.”
 

 난 섭섭함과 놀람이 섞인 눈을 크게 떴다.

 

 “왜?”

 

 “처음 볼 땐 잘해주면서 유럽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봐. 말해주면 하나같이 이래.”

 

 그는 ‘아…’하는 표정을 따라 해 보였다.

 

 “그때부터 개무시하고.”

 

 그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숨을 내쉬고 덧붙였다.


 “아마 북한보다 못 살걸.”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그때 그는 친구와 동거를 하고 있었다. 호텔로 가는 길에 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멈춰 섰다.


 “잠깐만. 아, 아… 진짜 너무 아파.”


 감기가 천천히 심해지더니 비상식적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약국에서 약을 샀다.  


 아침에 일어나서 집에 가야 했다. 열이 펄펄 끓고 목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입을 아 벌리면 잇몸에 하얀색 물질 같은 게 가득 차있었다. 엄마와 갑작스레 병원에 갔다.  


 전염성 단핵구증. 날 괴롭힌 그놈 이름이었다. 엄마가 옆에 있는데 의사가 말했다.


 “이게 키스로 전염이 되는 병이에요.”


  일명 ‘키스 바이러스’.


  철렁.

  

 “이십 대에 많이들 걸려요.”

 

 가족들은 내가 외국인과 연애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의사가 내게 물었다.

 

 “남자친구 있어요?”
 

 엄마를 봤다. 아니지? 하고 묻는 표정 반, 설마 하는 표정 반이었다. 그냥 친구들이랑 같이 먹다가 그랬다든지 여러 핑계가 있었는데 충동적으로 말했다.


 “네, 있어요.”


 그렇게 놀란 엄마 얼굴은 처음이었다.


 “남자 있나?”


 내 손목을 잡고 끌고 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어.”


 “어디까지 갔는데?”


 엄마가 화를 냈다. 난 지기 싫어 도발적으로 대답했다.


 “다 해버렸어. 다 했어.”


 내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평생 산 엄마의 그때 표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딱  시간이 멈춰버린 듯 날 쳐다봤다. 다음 순간 엄마가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더러운 년, 걸레 같은 년.”


 하긴, 엄마로선 그 상황에 할 만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정신없이 아픈 딸에게 좀 더 부드러운 말로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자, 일단 쉬어라 같은 말을 해줄 줄 알았다.


 “어떤 앤 데?”


 난 화가 났다.


 “외국인인데.”


 “어디 나라?”


 “우즈베키스탄.”


 충격에 충격을 거듭한 엄마 표정이 일그러졌다. 또 그 말 나올 때가 됐지, 난 이미 엄마의 질문을 예상했다.


 “일부다처제 아이가?”


 너가 몇 째 부인이니?

 언니, 그 남자 고향에 아내 있는 거 아니야?  

 넌 왜 미국 영국 프랑스 다 냅두고 하필 우즈베키스탄이야.  

 

 “우즈베키스탄 일부다처제 아니야.”

 

 일주일간 학교도 가지 못하고 입원을 했다. 천안에서 안양까지 병문안을 온 친구들에게 엄마가 내 앞에서 말했다.


 “쟤 더러운 년이니까 오지 마라.”


 그 말만 안 했다면 어쩌면 지난 4년간 그렇게 엄마를 속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난 링거 때문에 옷을 갈아입으려 커튼을 잡고 엄마에게 말했다.


 “나 옷 갈아입게 나가있어.”


 은근한 복수였다. 엄마는 울컥한 얼굴로 말했다.


 “남자한텐 니 몸 보여주면서 엄마한텐 안 되나?”


 송곳으로 쿡 찌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엄마를 향해 문을 닫기로 결심했다. 난 날카롭게 소리쳤다. 나가라고!

 

 나가라고. 그때 엄마를 병실 밖으로, 내 밖으로 내보냈다.

 

 잠시 후 멀찍이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모와 통화하는 엄마 소리였다. 우우우 우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난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무릎에 눈을 파묻었다.  

 그때부터 간섭이 시작되었다. 내가 어디 나갈 때마다 눈치를 줬다.


 엄마는 우리가 금방 헤어질 거라 믿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예상을 뒤엎고 나는 그와 계속 잘 만났다. 그렇게 사귄 지 1년이 됐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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