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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점 Oct 19. 2023

첫사랑에게 걸어갔다. Andante

열아홉 걸음

 지형이 노래방 소파 위에 털썩 누웠다.


 “아! 귀찮아 죽겠어.”


 “왜?” 유성이 따라 앉았다.


 “고은새가 데리러 오래.”


 “근데 진짜 니랑 고은새랑 사귄 건 좀 깜놀이었다.”


 준영이 말했다.


 “누가 고백한거야?”


 “내가.”


 “근데 왜 귀찮아? 그럴거면 고백은 왜 했냐?”


 유성, 지형, 세훈, 준영, 재원, 현수가 한꺼번에 말이 없었다. 


 “갔다올거임?” 


 유성이 물었다. 지형이 죽도록 귀찮은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작게 물었다.


 “이제 김은오 완전 넘어오지 않았냐?”


 유성은 대답 없이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악 씨, 지형은 머리를 탈탈 뒤집더니 일어나 나갔다.                    




 학원 로비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문자를 하는 은새에게 지우가 다가왔다. 문자 내용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야, 너 이지형이랑 아직도 사귀어?”


 “어? 어어.”


 “왜?”


 “아직 타이밍 못 잡았어.”


 은새가 킥킥 웃으며 문자 했다. 지우가 잠시 뭘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야, 근데 나 다른 반 애들이 하는 얘기 들었는데, 김은오가 이지형이 너랑 사귀니까 정유성 고백 받아준거래. 그러면서 그거 걔네가 일부러 짰다는 말 들었어.”


 “뭔 소리야?”


 은새가 문자를 보며 큭큭 웃었다.


 “그러니까, 정유성이 김은오랑 사귀고 싶은데 김은오가 이지형 좋아해서 못 하니까, 자기가 김은오랑 사귀려고 이지형이 너랑 사귀게 짠 거다 이거지.”


 은새는 문자하느라 대답이 없었다.


 “저기요.”


 “응? 어? 몰라몰라. 아, 이지형 너무 웃겨. 아, 아니야. 은오 정유성 좋아해. 절대 아니야.”


 “진짜로?”


 “어. 정유성 엄청 좋아해. 눈치만 딱 봐도 이지형한테 관심 1도 없어.”


 “하긴. 정유성이 남친인데 딴 데 눈이 팔리겠냐.”


 은새가 고개를 돌려 지우를 봤다.


 “정유성 잘생기긴 했는데 난 그런 스타일 별로. 솔직히 이지형같이 웃기고 활발한게 낫지.”


 “그건 둘 다 똑같잖아.”


 “근데 이지형같이 순수한게 차라리 낫다. 정유성 걘 너무 돌아먹었어. 야, 롯데월드 갔을 때 어땠는 줄 아냐? 열기구 안에서 은오한테 지맘대로 뽀뽀해가지고 은오 놀라서 도망갔잖아.”


 “미친. 진짜로?”


 “어! 악 맞다. 걔 그래서…”


 은새가 웃음을 터뜨리며 손뼉을 탁 치고 동영상을 켜 보였다. 지우가 입을 손으로 가리며 풉 웃고는 입을 떡 벌렸다.                     




 학교에 축제 현수막이 걸렸고 안팎으로 북적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더 왁자해졌다. 급식으로 스파게티가 나왔다. 지형은 토마토 스파게티를 싫어했다.


 은새는 실실 웃으며 도시락 두 개를 들고 교정에 있는 한적한 정자에 앉았다. 생색을 내면 얼마나 좋아할지 상상만 해도 웃겼다. 도시락을 열어서 어디 무너진 데는 없는지 확인했다. 전화를 하려고 핸드폰을 드는데 문자가 왔다. 지형이었다.     


 야 미안 우리 헤어지자     


 은새는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왜?     


 십 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냥 마음이 식었어      


 보는 순간 손에서 도시락이 떨어졌다. 새벽 네 시부터 부엌을 뒤집어엎은 음식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참을 그대로 앉아서 한 가지만 생각했다. 왜? 왜? 왜? 그때 번개같이 떠올랐다.


 ‘자기가 김은오랑 사귀려고 이지형이 너랑 사귀게 짠 거다 이거지.’


 설마.


 은새는 가만히 앉아 무릎 위에서 떨리는 손만 봤다. 물 한 방울이 손 위로 툭 떨어졌다.     


 유성은 정신없이 뛰어 강당에 들어갔다. 합창부 공연을 꼭 봐주기로 했었다. 은오에게 전화를 하며 유니콘 탈을 쓰고 곰 발바닥 인형을 손에 끼운 채 무대 대기실로 들어갔다. 은오 얼굴이 환해졌다.


 “아까 동아리 애들이 그러던데 이지형 은새랑 깨졌대.”


 기껏 사람들 다 뿌리치고 달려와 줬더니 유성을 보자마자 은오는 물었다. 


 “진짜야?”


 왜? 가서 고백이라도 하게? 


 유성은 무슨 상관이냐는 듯 입꼬리를 으쓱했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유성은 스마트폰을 들고 피아노 앞에 앉은 은오를 찍기 시작했다. 반주에 맞춰 부원들이 노래했다. 화면을 확대해 은오만 나오게 했다. 누가 보면 콩쿠르에 온 줄 알 듯했다. 유성은 훗날 옛 핸드폰을 꺼냈다가 보고 깜짝 놀라 추억에 잠길 영상을 실실 웃으며 생각 없이 찍었다. 


 나의 사랑,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삶이 끝날지라도. 


 화면 속 은오가 유성을 돌아보며 웃었다.                    




 늦은 오후 경아는 하교하며 1학년 6반을 지나쳤다. 불이 켜져 있었다. 정유성 반. 안을 기웃거렸다. 누가 책상에 책을 펴놓고 가방도 있는걸 보니 잠깐 나간 듯했다.


 호기심에 들어가봤다. 교탁에 놓인 자리 배치도에서 유성 자리를 찾아 다가갔다. 같은 교실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설레었다. 공허하고 가슴이 저릿했다. 


 경아는 뒷문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은오 자리를 쳐다봤다. 책상 위에 놓인 은오 핸드폰을 보고 다가갔다. 밖을 살피니 아무도 없었다. 경아는 침을 한번 삼키고 노리폰을 켰다. 잠금장치가 되어있지 않고 빨간 풍선이 떠올라 있었다. 풍선을 눌렀다. 삐요오오옹? 파앙!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경찰차 소리 같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핸드폰을 뒤져봤다. 유성과 한 문자를 읽었다. 경아는 빨개진 눈을 소매로 쓱 닦았다. 연락처를 뒤져보다가 이지형이라고 적힌 글자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장난기가 올랐다. 문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야 이지형’


 전송했다. 사귀자, 한 마디만 장난쳐놓고 가려 했는데 한번 시작하니 무모해졌다. 경아는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못 할 거 같았는데 그냥 말할게…얼굴 보고 말하면 말 못하겠어서. 나 중학교 때부터 너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해. 물론 지금 정유성이랑 사귀고 있긴 한데 사귈수록 내가 진짜 좋아하는게 너인게 자꾸 와닿아. 지금 당장 뭐 어떻게 하고싶다는게 아니고 그냥 내 마음 고백하고 싶었어. 창피하니까 답장하지마. 못 본 척해. ㅠㅠ 못 본 척하고 그냥 뻔뻔하게 대해줘.’     


 전송한 후 흔적을 싹 지웠다. 핸드폰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 6반을 나와 잰걸음으로 도망치듯 걸었다. 얼굴이 뜨거웠다. 걸어갈수록 현실이 와닿았다. 집 문 앞까지 왔을 때 걸음을 멈췄다. 


 아, 장난이 너무 심했다. 


 한참을 그대로 서서 생각에 잠겼다. 학교로 돌아갈지 집으로 들어갈지 양발이 서로 끌어당겼다. 마침내 돌아서 학교를 향해 달리듯 걸어갔다.


 핸드폰은 두고 온 그대로 놓여있었다. 불도 여전히 켜져 있었다. 


 “헐.”


 정유성에게서 부재중 전화 여러 통과 문자가 와있었다. 문자기록에 들어갔다. 경아가 보낸 문자를 캡처한 사진과 함께 유성이 물었다.     


 이거 뭐야?     


 문자가 온 시각 5시 19분, 현 시각 6시 8분.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전에 들렸다. 순간 방금까지 괴롭던 마음의 짐이 느껴지지 않았다. 경아는 노리폰을 두드려 유성에게 답장했다.


 미안


 바로 전화가 왔다. 놀라 확 끊어버렸다. 경아는 전화기록과 문자기록을 전부 지웠다.                     

 



웃으며 당구를 치던 지형은 주머니에서 알림이 울린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보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조용해졌다. 


 “야야, 유성아. 이거 뭐냐?”


 지형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유성은 생각 없이 받아들었다가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둘은 심각하게 당구장 밖 건물 복도로 나갔다.


 “아니, 근데 좀 이상한데? 갑자기 왜? 이럴 거면 먼저 나한테 헤어지자고 하는 게 순서잖아.”


 흥분한 유성이 미간을 구긴 채 말했다. 


 “나랑 사귀고는 싶은데 너랑 헤어지기는 싫은…건가?”


 “뭐야, 그게.”

 

 유성이 딱딱한 얼굴로 픽 웃었다.


 “나랑 사귀게 되면 너랑 헤어질 건데 나랑 못 사귀면 너랑 헤어지긴 싫은 거 아냐?”


 지형이 말했다. 유성은 눈을 감고 헛웃음을 뱉었다. 비참했다.


 지형이는 좋아하는 거고, 난 아쉬운 거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마음 한복판이 송곳에 쿠우욱 찔리는 것 같았다.


 “일단 직접 물어볼게.”


 유성은 지형에게 문자를 캡처해서 보내달라고 한 다음 사진을 은오에게 보내고 뭐냐고 물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둘은 일단 둘끼리만 아는 걸로 하고 들어갔다. 유성은 큣대를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야, 유성아. 안 치냐?”


 “아아, 잠깐만. 지금 당구 칠 기분 아니야.”


 왜 저러냐고 재원이 지형에게 물었다.


 “사춘기 왔나 봐.”


 지형이 말했다. 친구들이 한참 시끌시끌 당구를 칠 때 유성은 혼자 눈썹을 찌그러뜨리고 은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자 계속 핸드폰을 켰다 끄길 반복했다. 그러는데 띵, 문자가 왔다. 유성은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봤다. 딱 한 통이었다.


 미안


 바로 은오에게 전화를 거니 끊겼다. 


 “…끊었어.”


 유성은 멍하니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지형이 다가와 물었다.


 “야야, 뭐냐? 뭐래?”

 유성이 어이가 없고 기가 털리는 표정으로 지형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말도 없이 입을 허 빌린 채 쳐다보는 눈동자가 눈물로 가득 덮였다. 한번 깜박이자 굵다란 물이 두루룩 흘러내렸다.


 지형이 유성을 데리고 슬쩍 당구장을 나왔다.


 “지형아.”


 아무 말 없던 유성이 입을 열었다.


 “와이.”


 “자존심 상해 미칠 거 같애.”


 “헤어지쟤?”


 유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미안하대.”


 “그 말이 그 말이네.”


 지형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야, 이렇게 하자. 너 이번에 이지수가 너한테 고백했잖아.”


 유성은 듣고만 있었다.


 “걔랑 사귀어.”


 유성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귀라고. 애들한테 니가 이지수 좋아져서 김은오 찼다고 하자고.”


 유성은 심각한 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김은오가 이런 짓 한 건 우리 둘만 알고 있고. 죽을 때까지 우리 둘만.”


 유성은 벽에 기대 죽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친구가 최고다.”


 “그래, 야. 세상의 반이 여자야. 걍 잊어버려.”


 조용했다.


 “근데 지형아.”


 “응?”


 유성이 얼굴을 손에 묻은 채 말했다.


 “나 걔 좋아하거든…너무너무 좋아하거든. 사랑한단 말이야.”


 지형이 눈알을 위로 굴리며 손가락으로 맴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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