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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점 Nov 06. 2024

1화


















이야기를 들어가기 전에……






















어느날 '아갈'의 우두머리 '씨'가 '차바'에 와 신에게 말했다.


“실수가 없으시고 실패가 없으신 조물주시여, 당신이 만든 저 '릭카핀'들에게 저와 당신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신은 열다섯 명의 릭카핀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모았다. 공간엔 파란 단추와 빨간 단추가 있는 탁자가 열다섯 개씩 놓여있었다. 


“파란 단추는 나의 세계, 차바에 있겠다는 뜻이고 빨간 단추는 아갈의 세계에 있겠다는 뜻이다.”


신이 명령했다.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너희는 파란 단추를 눌러라.”


아무도 아갈의 세계에 가고싶은 릭카핀은 없었다. 딱 한 명 빼고. 단은 신의 세계 차바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신이 사라지자 아갈이 나타났다.


“신은 너희를 속이고있어.”


거짓말쟁이 아갈을 믿는 릭카핀은 아무도 없었다. 딱 한 명 빼고. 단이 고개를 들어 아름다운 씨를 바라보자 씨도 단을 마주 봤다.


“아갈의 세계는 너희가 하고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어. 이곳과 달라. 왜 못 믿는 눈치지? 너희가 그 아름다움에 정신을 놓고 자기를 떠나버릴까봐 그러는거야.”


종이 울렸다. 


빨간 단추가 영롱하게 빛났다. 반도 자기 앞에 놓인 두 단추를 바라보았다. 붉은 연기가 탁자 밑에서 피어올랐다. 


반과 단을 제외한 열세 릭카핀은 종이 울리자마자 냉큼 파란 버튼을 눌렀다. 파란 버튼을 누르자 황홀한 빛이 터져나와 릭카핀을 감쌌다. 


“안 돼!”


열세 릭카핀은 빨간 버튼을 향해 손을 뻗는 반과 단을 향해 소리쳤다.


반과 단은 고개를 들어 아갈의 세계를 넘어보았다. 호기심설레임욕망탐심흥분신비로움아름다움………………………


둘은 빨간 단추를 눌렀다.


그 순간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반과 단의 눈 앞에 수많은 어마어마한 일이 빛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금 이 순간부터 세계의 종말까지 일어날 역사의 모든 순간들이 그날 한 순간, 순식간에 빛처럼 스쳐 지나갔다.


두 릭카핀의 눈에서 뜨거운 후회의 눈물이 흘러 나온 것은 그 모든 순간들이 끔찍히도 슬프고 도무지 믿을 수 없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죽음, 살인, 배신, 사기, 슬픔, 대적, 고문, 싸움, 전쟁, 그리움, 고통, 혼란, 분열, 모독, 혐오, 무질서……씨가 찢어지는 소리로 웃었다. 둘을 제외한 릭카핀들은 도망쳤다.


둘은 얼른 다시 파란 단추를 누르려고 황급히 단추를 향해 눈을 돌렸다. 탁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온 공간에 씨가 웃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깔깔깔깔!"


씨는 혐오스럽게 웃으며 본모습으로 돌변했다. 얼굴 정 중앙에 하나 뿐인 눈 바로 위에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999

999


모든 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마리아갈 중 가장 우두머리인 씨는 입꼬리를 얼굴 끝까지 찢어 당기며 날카로운 이빨을 가득 드러냈다. 


“실패했어! 그가 실패작을 만들었어! 가자, 실패작들아!”


순식간에 반과 단을 낚아 챈 씨는 자기의 세계로 날아갔다.


아갈의 세계는 끔찍한 곳이었다. 반과 단은 살아남기 위해 평생 아갈을 피해 온갖 장소로 도망치며 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실패작이야. 신은 실패작을 버렸어. 실패작이니까.”


“그에게 들키면 안 돼. 실패작을 보면 파괴해버릴테니까.”


어느날, 반과 단은 아갈을 피해 숲 속 깊은 동굴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둘은 동시에 같은 꿈을 꾸었다. 꿈에 신이 나타났다.


반과 단, 너희에게 열세 명의 자식을 주겠다.


신은 계속 말했다.


첫째 아이에게는 빛을 선물하겠다.


그 말이 끝나자 두 팔을 현란하게 휘둘러 찬란한 빛을 다루는 릭카핀의 모습이 보였다.


둘째 아이에게는 물을 선물하겠다.


그 말이 끝나자 두 팔을 잠잠히 뻗고 눈을 감은 채 집중하다가 눈을 번쩍 뜨고 두 팔을 처들어 큰 물을 일으키는 릭카핀의 모습이 보였다.


셋째 아이에게는 땅을 선물하겠다.


그 말이 끝나자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가며 오른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펴고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입김을 작게 불자 장대한 땅이 펼쳐지는 릭카핀의 모습이 보였다.


넷째 아이에게는 풀을 선물하겠다.


그 말이 끝나자 부드러운 흙 위에 사지를 펴며 눕자 수만 가지 종류의 꽃과 풀이 순식간에 뻗어나가 대지를 덮는 릭카핀의 모습이 보였다.


다섯째 아이에게는 나무를 선물하겠다.


그 말이 끝나자 손끝을 하늘로 향한 채 손을 펴고 양 팔을 탁 벌려 거대한 나무들을 종류대로 땅을 뚫고 솟아 올리는 릭카핀의 모습이 보였다.


여섯 째 아이에게는 냄새를 선물하겠다.


그 말이 끝나자 온 몸을 춤추듯 아름답게 돌려 수많은 오색 향기를 피어 올리는 릭카핀의 모습이 보였다.


일곱 째 아이를 내가 특별히 사용하겠다.


그 말이 끝나자 세 가지 모습이 차례로 빠르게 지나갔다. 


첫 번째 장면은 찬란한 푸른 빛을 내는 검이었다.


두 번째 장면은 작은 섬이었다. 


세 번째 장면은 어마어마한 전쟁이었다. 온 골짜기가 개미 떼같은 릭카핀으로 가득 차 새까맸다. 그 넓은 사방이 모두 피로 물드는 끔찍한 전쟁이었다.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여덟 째 아이에게는 소리를 선물하겠다.


그 말과 동시에 차분히 손가락을 움직여 신을 노래하는 소리들을 빠르게 날려올리는 릭카핀의 모습이 보였다.


아홉 째 아이에게는 색깔을 선물하겠다.


그 말과 동시에 양 팔을 쭉 펴고 허리를 굽힌 채 바람처럼 빠르고 자유분방하게 달려가며, 그 열 손가락 끝에서 절묘한 색들을 길게 뻗어내 만물에 색을 입히는 릭카핀의 모습이 보였다.


열 째 아이에게는 돌을 선물하겠다.


그 말과 동시에 사지를 활짝 펴고 어둠 속에서 수많은 거대한 보석들을 번쩍 비춰내는 릭카핀의 모습이 보였다.


열한 째와 열두 째 아이에게는 각각 차가움과 뜨거움을 선물하겠다.


그 말과 동시에 세 가지 장면이 지나갔다. 첫 번째 장면은 서로 등을 맞댄 두 릭카핀이었다. 한 명이 손에서 하얀 연기를 피어올리자 사방이 얼어붙었다.

다른 한 명이 손에서 붉은 연기를 피어올리자 사방이 달아올랐다. 둘이 손을 잡자 온도가 이루어졌다.

두 번째 장면은 빛나는 왕관의 반쪽이었다.

세 번째 장면은 어마어마한 전쟁이었다. 


마지막 아이에게는 불을 선물하겠다.


그 말과 동시에 두 가지 장면이 지나갔다. 첫번째 장면은 두 팔을 동서로 뻗은채 힘있고 빠르게 춤추듯 돌며 발을 박자에 맞춰 움직여 화려한 불을 훨훨 타올리는 릭카핀의 모습이었다.

두 번째 장면은 빛나는 왕관의 반쪽이었다.


신은 예언했다.


빛의 아이를 주의하라. 빛 한 줄기가 모든 어둠을 흩으리라.

물의 아이를 주의하라. 그 물에 온 세상과 생명의 기운이 잠기리라.

풀의 아이를 주의하라. 무수하게 번성하리라.

일곱째 아이를 주의하라. 골짜기를 피로 물들이리라.

두 아이를 주의하라. 왕관은 하나 뿐이니라.

어둠을 업으나 빛에 흩어지리라.

다시 감당할 수 없는 어둠을 업으나 일곱째 아이를 주의하라. 

불의 아이를 주의하라. 예상치 못한 곳에서 타오르리라.

세계의 끝날에 모든 아갈이 깨어나 전쟁을 일으키리라. 세계는 반으로 갈라져 서로를 대적하리라. 기억하라. 세상이 끝나지 않는 한 아갈은 절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다시 두 단추 앞에 서게 되리라.


꿈에서 깬 반과 단은 땀을 물처럼 흘리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숨을 헐떡이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섬뜩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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