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걸음
버스 안, 은오가 전화를 받았다.
“은오야, 뭐하냐?”
“나 지금 버스야. 아빠 유골 가지고 집 가.”
은오가 무릎 위에 놓인 함을 쓰다듬었다.
“아, 오늘이구나.”
“결혼식 언제랬지?”
“서른셋에 치매가 왔나. 4월 10일이라고. 너 그때 말한 대로 그날 못 오나?”
유골함을 만지작댔다.
“응, 난 좀 그래. 미안.”
집에 도착해 방에 들어갔다. 넓은 방 안에 책꽂이 네 개가 도미노처럼 놓여있었다. 제일 깊숙한 안에 들어갔다. 책꽂이 중 유골함을 두려고 마련해놓은 자리가 비어있었다. 두려다 말고 유골함을 안은 채 바닥에 앉았다. 책꽂이 사이에 처박혔다. 서현과 효영이 웃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은오는 한참 멍하니 돌처럼 앉아 눈만 깜박였다. 방이 점점 깜깜해지며 밤이 되었다.
방 안 어둠에 파묻혀있던 엄마에게 문을 따고 들어와 밥은 먹고 죽자던 아빠. 그때 아빠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걸까? 엄마는 어떤 모양새로 있었을까? 지금 나처럼 책꽂이 사이 구석에 처박혀 있었을까? 지금 누가 방문을 열고 날 찾아왔으면…모서리에 박힌 날 찾아내 줬으면…은오는 생각했다. 밤이 다 지나가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어둠이 옅어지고 조금씩 사방에 노란빛이 선명해져 갔다. 은오는 정면을 응시했다. 눈앞에 걸음을 멈추고 책꽂이 사이에 있는 은오를 쳐다보며 씩 웃던 누군가가 보였다.
찾았다.
먼 과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돌 같던 은오 표정이 바뀌었다. 이를 드러내며 미소가 천천히 번졌다. 은오는 핸드폰을 들어 장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연결음이 이어졌다.
“어, 왜?”
“장미야, 나 갈게.”
은오가 활짝 웃었다.
“결혼식.”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퇴근하는 유성이 건물에서 나왔다. 회사 주차장에서 차를 빼는데 전화가 왔다.
“뭐해? 바빠?”
재원이 물었다.
“지금 퇴근해. 야, 연락 좀 하고 살아야 되는데. 목소리라도 들으니까 좋네.”
“그러니까. 한번 보자고. 니가 바쁘잖아. 매출이 시도때도 없이 억을 찍으니 친구가 우습지?”
“무슨 시도때도 없이야. 연말에 시간낼 수 있을걸. 왜 전화했어?”
“야, 나 결혼해.”
“진짜로?”
유성이 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푸학 웃음을 터뜨렸다.
“아, 부러운 새끼. 언제? 야, 우리 다 모이겠네!”
“벌써 전화 다 돌렸어. 니가 제일 마지막이야.”
“아, 좋네. 야, 축하해.”
“너는 잘 돼 가는 사람 없어?”
“잠 잘 시간도 없어.”
차가 신호등에 멈춰 섰다. 비가 내렸다.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와이퍼 움직이는 소리가 한데 섞였다.
결혼식 날, 지형, 세훈, 현수, 미나가 먼저 와 의자에 앉아있었다. 자리가 모자라 유성은 서 있었다. 신랑신부가 입장하자 피아노 연주가 울려퍼졌다. 모두 박수를 쳤다.
신부 측을 보던 유성은 눈길을 고정했다. 검정 플레어 미디스커트에 까만 앙고라 목티를 입고 하루타 로퍼를 신고 연두색 빈티지 자켓을 걸친 사람. 유성은 음악과 박수 소리 속에서 은오를 뚫어져라 봤다. 은오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고개를 천천히 돌려 유성을 봤다. 무표정으로 쳐다보는 은오를 유성도 똑같이 쳐다봤다.
식당에서 은오는 접시에 음식을 담고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야! 야, 너, 그...은...은...”
자리에 앉던 미나가 토끼 눈을 하고 은오를 보며 버벅거렸다.
“김은오.”
유성이 알려주자 미나가 웃으며 손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아, 맞아. 은오야! 김은오!”
둥근 탁자에 지형, 세훈, 미나, 현수, 유성이 둘러앉아 있었다. 은오는 비어있는 유성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와, 진짜 오랜만이다. 어떻게 지냈어?”
미나가 옆에서 물었다.
“나 이번에 회사 관뒀어. 하고싶은게 있어서.”
“부럽네. 진짜 회사 미치도록 가기 싫다.”
은오가 웃었다. 고개를 돌려 자기를 보고 있는 유성을 봤다.
“와, 진짜 오랜만이다.”
유성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은오가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십오 년이란 공백이 둘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은오가 말했다.
“처음에 뉴스에서 너 보고 깜짝 놀랐어.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나오는 거야.”
다들 동조했다. 은오가 이어 유성에게 말했다.
“진짜 대단하다. 나 거기서 옷 산 적 있어.”
“오, 진짜? 어떤 거?”
“청바지. 와, 비싸던데.”
은오가 웃었다. 유성이 두 손을 내저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게 그 가격으로 팔아도 마진이 진짜 안 남아. 퀄리티 생각했을 때 솔직히 그 가격들로 팔 수가 없어……”
“너는 그때 살던 데 사나?”
조수석에 앉아 벨트를 매며 은오가 물었다.
“아니. 혼자 살아. 우리 엄마아빠 고향 내려가 있어.”
유성이 가방을 뒤적이더니 파일 하나를 꺼냈다.
“야, 나 너한테 줄 거 있어.”
꺄아악, 건네받는 은오가 비명을 지르고 동시에 유성은 자지러지게 웃었다.
<간절한 사랑> 김은오 장편소설.
“아니, 그게 이사 갈 때 나왔다니까. 아빠가 우리 가족 다 있는 데서 이걸 들고 누구 거냐는 거야.”
은오는 새빨간 얼굴로 크게 웃었다. 유성이 종이를 펼쳐 1면 중 한 부분을 읽었다.
“식당에서 유성을 보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뒤에서 후광이 발하는 듯했다. 하지만 난 말을 걸지 못했다. 그와 나의 거리는 너무 멀기 때.....”
“하지마! 진짜 죽는다. 하지마!”
은오가 파일을 확 빼앗고 유성은 끅끅 웃었다.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나 너한테 물어볼거 있어.”
“뭔데?”
“너 어릴때 고상 초등학교에서 음악회 한 적 있지?”
은오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나 거기 있었거든.”
유성이 웃었다.
“그때 너 피아노 치는 거 봤었어. 그 곡 이름을 꼭 물어보고 싶었거든? 근데 내가 까먹고 얘길 안 했었나봐. 혹시 물어봤었냐?”
“몰라. 생각이 안 나. 우와, 신기하다.”
묻는 얼굴로 유성이 쳐다보자 은오가 대답했다.
“그거 이름 없는 곡이었어.”
은오가 말했다.
“어릴 때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나 되게 사랑해준 분이 있거든. 아빠 없어서 이제 어린이날에 놀이공원 못 간다고 하니까 직접 놀이공원에 데려다주고, 체한 줄 알고 아플 때 업고 병원까지 뛰어주고. 그분이 지방으로 멀리 악기상점 하러 내려가시기 전에 선물로 주신 자작곡이야.”
“한번 또 쳐줄 수 있어?”
“악보가 없어. 크면서 사라졌어.”
유성이 안타까운 얼굴로 탄식했다.
“새로 만들면 되지. 만들어줄게.”
은오가 말했다.
“만들 수 있어?”
“야, 내가 피아노랑 이십 년을 싸운 인간이야. 다른 좋은 거 하나 만들어줄게.”
유성이 활짝 웃었다.
“언제? 내 눈앞에서 쳐줘.”
“그래. 너 시간 될 때 말해.”
일주일 후 만나기로 약속했다. 유성은 은오를 집 근처까지 태워줬다. 멀리 걸어가는 은오를 차창 너머로 쳐다보던 유성은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할까 고민했다.
그날...십오 년 전에...미술실 앞에서, 미안하다고, 오해가 있었다고,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너무 좋아했다고, 늘 잊지 못했다고.
유성은 차 문을 열었다.
“아, 왕년에 한 달리기 했었는데.”
그리고 열셋, 피아노를 치던 김은오,
열넷, 계단을 뛰어 내려오다 책을 쏟던 김은오,
열다섯, 식당에서 미소짓던 김은오,
열여섯, 고등학교 지망서를 쓴 후 복도에서 마주친 김은오,
열일곱, 헤어지자는 말에 고개를 떨구던 김은오,
열여덟, 공원에서 멀어지던 김은오,
서른셋, 지난 모든 순간 운명이라 확신하며 잊지 못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