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성, 그 사랑
4. 앞 세 이야기는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 주해(알라딘 서재: 싸리·버들 글숲)에 쓴 내용과 순서를 고쳐 다시 썼다. 이 수정에는 1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는 동안 진전된 공부가 일정 정도 반영돼 있다. 여기에 다음을 부가한다.
마지막 글 인용문에 나오는 “먹임”과 “봉헌”이라는 말에 좀 더 내밀하게 배어들어 본다. 나를 너에게 먹인다는 표현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성과 그 사랑은 내 생명 실재를 네게 먹이는 일이다. 봉헌이라는 표현 또한 관념이 아니다. 성과 사랑은 내 생명 실재를 네게 제물로 바치는 일이다. 먹임과 봉헌이라는 표현에는 더함도 덜함도 없는 액면가가 매겨져 있다.
성교 사건은 식사 사건이며 제의 사건이다. 제국 백색문명은 이 모두를 도구화했다. 도구화는 오락화다. 오락화는 희화화다. 희화화는 종말론적 증후다. 오늘 우리 사회 풍경이 웅변으로 증언한다. 감각적으로 가장 손쉽게 확인하는 방법은 TV 채널을 차례로 돌리는 일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든 프로그램이 희화화된 장면을 곧바로 마주할 수 있다. TV만이 아니다. 대중매체 거의 전부가 그렇다. 이는 정치 희화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국가수반과 그 아내가 스스로 희화화하는 풍경을 시시각각 마주하니 모방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 상황에서 놓여나려고 통속한 지성과 저널리즘으로 비판하는 일은 겨 묻은 손으로 똥 묻은 손을 씻는 짓이다.
나그네가 병들었을 때 고치려면 고향으로 돌아간다. 우리 존재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본다. 단세포 생명체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체 하나를 먹는/먹이는 태초 사건에서 다세포 생명체가 탄생했다. 먹다/먹이다, 이 표현은 오늘날 인간이 지니는 이해 능력에 비추어 사건 전체를 담아낼 수 없다. 단세포 생명체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체 하나와 성적으로 결합해서 다세포 생명체, 그러니까 “다른 존재”, 다시 그러니까 “아름다운 둘”이 되었다는 표현이 더해져야 한다. 하나가 더 필요하다. 단세포 생명체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체 하나에게 봉헌하여/되어 창발적 제의, 그러니까 네트워킹 사건이 일어났다는 표현까지 더해져야 한다. 이 진실 전경 앞에서 낄낄거리는 순간 저 “봉헌의 기적” 거룩한 계보에서 이탈한다.
거룩한 계보는 다른 이름을 지닌다: 공생. 린 마굴리스가 밝힌 우리 시대 최고 진실, 인간은 정확히 질량으로, 에너지로, 소식으로 이 세포내공생 계보를 따른다. 공생으로서 인간 심신 생명 구성 자체가 이미 다른 생명과 성교하고 식사하고 봉헌한/하는 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성교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일은 다른 생명체를 먹는 일, 죽어서 다른 생명체 먹이가 되는 일과 본성이 같으며, 이 두 일 모두 신성하고도 질탕한 제의 본성을 지닌다.
성교와 식사와 제의는 서로 가로질러 감으로써 “아름다운 둘”이 소통하는 전경을 풍요롭게 만든다. 인간이 지니는 성적 지향, 또는 성정체성이 이렇게 인간 경계를 넘어간다. 내가 숲에 들어가 걸으며 풀을 만지며 냄새 맡는 일은 숲과 성교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이 식사하는 행위도 이렇게 인간 경계를 넘어간다. 내가 숲에 들어가 걸으며 풀을 만지며 냄새 맡는 일은 내가 숲을 먹는 일이기도 하고 숲이 나를 먹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이 행하는 제의도 이렇게 인간 경계를 넘어간다. 내가 숲에서 길을 잃는 일은 숲에 빙의되는 일이다. 내가 숲에서 버섯에게 몰입하는 일은 버섯에게서 신성을 불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녹색 성, 그 사랑은 인간, 그 너머 모든 생명이 평등한 공동 주체로 제국 백색문명에 맞서 통일전선을 이루도록 하는 거룩하고 질탕한 네트워킹 사건이다. 무심코, 함부로, 더군다나 낄낄거리며 대해서는 망한다. 망조는 벌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