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의학 이야기 보론(8)

by 강용원

녹색 성, 그 사랑


3. “‘나’는 ‘나’를 ‘너’에게 먹임으로써 ‘나’ 자신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다. 사랑은 우리를 다른 존재가 되게 한다. 그것이 봉헌의 기적이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아름다운 둘이 되기 위해서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593쪽)


칼릴 지브란 절창 전부를 듣는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시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연 재구성은 필자)


결혼식에 가면 주례가 흔히, 아니 빼놓지 않고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로 사랑을 강조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며느리 아니고 딸이라며 시아버지더러 안아주라 하고, 사위 아니라 아들이라며 장모더러 안아주라 한다. 이런 언행들이 모두 호들갑 떠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주례를 설 때, 반대로 서로 남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호들갑은 도리어 현실 인식을 모호하게 하고 왜곡시켜 진실을 흐트러뜨릴 따름이다. 부부는 정녕 일심동체일까? 그래야 할까? 이미 칼릴 지브란이 답을 주었다.


저명인사 부부가 TV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 자기들은 한평생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사회자와 방청객이 함께 감탄하는 광경을 가끔 볼 수 있다. 실은 감탄이 아니라 탄식해야 마땅하다. 한평생 부부싸움이 성립하지 않을 조건은 딱 두 가지다. 서로 싸울만한 거리 밖에 있었거나, 어느 한쪽이 늘 죽어지냈거나. 후자 경우, 가부장적 우리 사회에서라면 당연히 여성 배우자 쪽일 터이다. 둘 다 정상적인 부부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기에 감탄과 존경을 보내는 일이 난센스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자아를 버리지 않는, 그러니까 봉헌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문제는 그 봉헌이 쌍방향이냐 아니냐다. 쌍방향성이 확보되어야 ‘타자성의 긍정과 자기 상실의 긍정이라는 이중 긍정’(593쪽)이 가능하다. 나를 버려 너를 살리는 행위가 마주 이루어짐으로써 자타와 생사 모순이 공존 역설로 달여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일방적 희생 자기 해체도, 일방적 수탈 자기 구축도 세상을 죽음으로 내몬다. 주는 사랑이 희생이 아니고 받는 사랑이 수탈이 아닐 때 비로소 이중 긍정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식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 사회는 이중부정 힘에 맹렬하게 이끌리고 있다. 제국 백색문명에 부역하는 특권층 패거리한테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타자성 부정, 자기 상실 부정 말이다. 특권층 부역 패거리는 파렴치한 자기 구축을 위해 절대다수 타자성을 잔혹하게 부정한다. 그 파렴치와 잔혹은 대놓고 함부로, 전방위·전천후로 드러난다. 놀라운 점은 드러날수록 파렴치와 잔혹이 더해간다는 사실이다. 누가 이 상황을 만들었을까. 어찌해야 아름다운 둘이 될까. 분노가 쌓이는 이상으로 공포·불안이 깊어진다.


깊고도 푸른 공포·불안을 극복할 아름다운 둘에서 “아름다운”은 그저 정서적 수사가 아니다. 신비주의와 기계론을 동시에 관통하는 질량이며 에너지며 ‘소식’이다. “둘”은 그저 ‘하나 아닌 둘’이 아니다. 하나, 둘에서 ‘둘 아닌 둘’이다. 이는 청원 유신 마지막 문장 “山是山 水是水”, 바로 그 산인 산, 물인 물 실재다. 아름답지 않으면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면 아름답지 않다. 이 아름다운 둘에서 네트워킹으로서 사랑이 창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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