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33): 공시적 이야기-아베의 축원㉗
끗빨 패거리(정관계) 부역 서사 4
경찰 문제를 이야기해 본다. 2020년 10월 26일 임영태 님이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에 쓴 글을 인용한다.
“미국은 남한 점령 후 당분간 총독부를 유지하며 남한을 통치하려 했으나 ‘해방된 이 마당에 일본인들의 명령을 또 들어야 한다는 말이냐?’라며 반발하는 한국인의 분노에 애초의 계획을 바꿔야 했다. 아베 총독에 이어 엔도류사쿠(遠藤柳作) 정무총감과 총독부의 일본인 국장들도 해임했으며 군정장관에 아놀드 소장, 경무국장에 조선 주둔군 헌병대장 쉬크(L. E. Shick) 준장, 그 외 국장에 미군 장교들을 임명했다. 9월 14일 미군정장관 아놀드는 기존 경찰기구의 행정적 이용, 새로운 경찰체계의 성격과 기능을 밝혔다. 이는 새로운 미군정 경찰의 탄생을 의미했다. 아놀드는 새로운 경찰권의 근거가 미군정에 있음을 4개 항목으로 설명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연합군최고사령부 포고 제1호 제2조에 의하여 북위 38도선 이남의 경찰기구는 그 기능을 계속하고 있다, 둘째, 정치단체나 귀환병단체 또는 일반 시민대가 경찰력 또는 그 기능을 행사하며 또한 행사하려는 것을 금한다, 셋째, 현재의 경찰기구는 종전의 일본 정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군정장관 밑에 운영되어 그 조직의 실권은 군정장관인 내가 직접 부여하며, 그 조직은 헌병사령관 시크 준장의 지휘하에 놓인다. 넷째, 경찰관은 군정장관으로부터 1) 무기의 휴대, 2) 체포, 3) 분쟁의 진압, 4) 법규 및 질서의 유지, 5)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되어 있는 현재의 경찰은 결국에는 전부 한국인으로 조직되도록 한다는 등의 직권을 보유한다.
또한 미군정은 군정법령 28호를 통해 사실치안단체와 사실군사단체의 해산명령을 내리고 치안대, 학대도, 보안대 등에 의한 치안 활동과 경찰기구 접수 운동을 불법화했다. 이로써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치안대 활동,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등의 지역 민중 자치 조직들의 활동은 미군정에 의해 배척되기 시작하였다. 미군정은 미전술군과 군정 경찰의 무장력을 바탕으로 인민위원회, 치안대 등 민중 조직을 배제하고 군정 통치 기반을 구축하려 함으로써 민중 자치 조직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9월 26일 일반 국민의 무장해제 조치를 취하였고, 9월 29일에는 무기 또는 탄약·폭발물의 불법 소지를 금지하는 내용의 군정법령을 발표하였다. 10월 9일에는 일제 여러 악법인 정치범 처벌법, 예비검속법, 치안유지법, 출판법, 정치범 보호관찰령, 신사법(神社法 ), 경찰의 사법권(경찰서장의 즉결처분권 등) 등이 폐지되었다. 이를 통해 일차적으로 중앙에서 경찰권을 확보하고 경찰기구를 재편한 미군정은 각 지방의 경찰권 장악에 나섰다. 지방의 경찰권과 치안권 장악은 일차적으로 미 전술군에 의한 지역 점령에서 시작되었고 1945년 말까지 38선 이남 지역의 전술군 배치에 의한 점령은 완료되었다. 미군정의 전술군 주둔과 함께 진행된 경찰권 장악에 따라 1946년 8월 말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민중 자치 조직으로서 치안대는 거의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지방에서는 치안대의 경우, 누가 장악하고 있었는가에 따라 미군정 경찰과의 관계가 결정되었다. 치안대가 우익에 장악되어 있었을 경우 군정 경찰조직에 흡수하였으나 좌익이 장악한 경우는 모두 해체되었다. 경기도의 경우는 경찰이 치안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전술부대가 동원된 경우가 거의 없었으나 경상도, 전라도의 경우는 군정 경찰이 치안권을 장악하지 못할 경우 미군 전술부대가 질서유지를 위해 동원되어야 했다.
미군사령부는 9월 12일 아놀드 소장을 군정장관에 임명함과 동시에 헌병사령관 쉬크 준장을 경무국장에 임명해 총독부 경무국을 그대로 인수했다. 미군정은 일본인을 포함한 모든 경찰을 존속시키고 그 기능을 지속하게 함으로써 빠르게 총독부 경무국이 갖고 있던 경찰조직을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초기 미군정 경찰은 일제와 다름없이 헌병 경찰조직이었다. 헌병사령관 쉬크 준장이 헌병과 경찰을 총괄, 장악했고, 전술군과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경찰 업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미군정은 일제시기 총독부의 조직체계를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경찰조직을 더욱 중앙집권화했다.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의 국립경찰이 지역의 대중적 통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제적이며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보고 중앙집권화된 경찰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경찰조직을 일제보다 더욱 중앙집권화했다.···
1945년 10월 21일 미군정청은 경찰 중앙기구로 경무국(The Bureau of Police, The Police Bureau)을 설치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경찰 제도를 확립하였다. 경무국의 설치와 함께 도지사 아래 도경찰부가 설치되었으나 이는 일제 경찰조직을 답습한 것이었고 실제로는 경무국의 통제를 받았다. 미군정은 경무국을 설치하면서 ‘국립경찰’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실제로는 미군정의 군정권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므로 군정 경찰이었다. 그럼에도 미군정이 국립경찰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미국의 경우 주경찰·시경찰 등과 같은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자치경찰이 있고 연방경찰이 있는데, 당시 미군정 경찰은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는 의미로 국가경찰, 국립경찰이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이다.
미군정 당국은 10월 29일 챔패니(Arthur S. Champeny) 육군대령을 경찰 감찰관으로 임명, 군정경찰에 대한 감찰을 시행하게 했다. 챔패니의 감찰 결과를 바탕으로 1945년 12월 27일 군정장관의 명령으로 「국립경찰의 조직에 관한 건」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 경찰은 하나의 국립경찰부대임. 조선인 경무국장은 조선 내 전 경찰의 최고사령관임.
2. 경무국장은 국립경찰의 조직·관리·훈련·수속·활동·인사 등에 관하여 책임이 있음
3. 경찰국 예산 자금은 경무국장에게 배당되며 경무국장은 이를 각도 경찰부장에게 할당함. 이에 대하여는 여하한 정부 기관도 간섭할 권한이 없음.
4. 각도 경찰부장은 기(基) 도내에서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고 경찰에 부과된 직무를 완수함에 있어 도지사에 대하여 책임이 있음. 도지사는 이 목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시를 각 경찰부장에게 할 수 있음. 도지사는 경찰의 조직·관리·수속·재정·인사에 관한 명령을 발할 권한이 있음.
5. 시 최고 경찰 책임자는 시 관할 구역 내에서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고 경찰에 부여된 직무를 완수함에서 시장에 대하여 책임이 있음. 시장은 이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지시를 시 최고 경찰 책임자에게 할 수 있음. 시장은 경찰의 조직·관리·수속·재정·인사에 관한 명령을 발할 권한이 있음.
6. 경무국장은 상례적 사항에 관하여서는 각도 경찰부장과 직접 통신함. 각 경찰부장은 그 도내의 모든 예하 경찰관과 직접 경찰 사항을 처리하고, 그 도내에서 발생한 모든 중요 사건을 도지사에게 통보할 것. 시 경찰 책임자는 시에서 발생한 모든 중요 사건을 시장에게 통보할 것.
7. 도지사는 경찰의 행동에 관하여 불만히 생각하는 관계가 있으면 경찰국장을 통하여 군정 장관에게 보고할 것.
8. 도지사·각 경찰부장·시장·시 경찰 최고 책임자는 이 경찰체제를 원활히 운영하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할 의무가 있음.
9. 지방 분권적으로 운용하는 동시에 중앙집권적 통할을 하는 것이 현 경찰조직의 관건임. 이것은 각자 관할 지역에서 통치기관으로서 그 임무를 다하는데 책임질 수 있는 경찰로서의 필요한 부속기관의 특징을 갖추 조직체로서 조선인이 잘 아는 바임.
군정장관의 명령에 따라 종래 도지사의 권한 아래 있던 경찰행정권을 분리해 도경찰부를 독립시키고, 도경찰부 밑에 총무·공안·수사·사찰·통신 등 5개과를 두기로 결정했다. 이 명령의 핵심은 군정경찰을 중앙의 경무국장의 배타적 관할하에 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군정 경찰의 조직·관리·훈련·수속·인사·재정 등 모든 면을 경무국장이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각도 경찰부를 도지사의 관할에서 배제, 독립시켜 경무국 산하의 조직으로 개편, 경무국장이 직접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는 경무국이 군정청 내에서 하나의 부서로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고 따라서 경찰의 고도의 중앙집권적인 조직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1946년 1월 16일 「경무국 경무부에 관한 건」이라는 군정 명령에 의해 경무국은 경무부로 확대, 개편되었고, 과는 국으로 바뀌어 총무, 공안, 수사, 통신, 교육 등 5개 국이 편성되었다. 이와 함께 경찰직급은 경무부장, 도경찰부장, 차장, 총경, 감찰관, 경감, 경사, 순경 등의 9계급제로 바뀌었다.
1946년 경무부 국장급 이상 간부들은 경무부장 조병옥, 차장 최경진, 총무국장 조주영, 공안국장 한종건, 수사국장 최능진, 통신국장 조응천, 교육국장 김정호, 감찰실장 조병설 등이었다. 당시 경찰 정원은 제복 경찰관과 형사를 합해 24,900명이었고 전체의 15%가 형사 관련 부서에 배치되었다. 경기도 6,300명, 강원도 1,700명, 충북 1,800명, 충남 2,600명, 전북 2,800명, 전남 3,100명, 경북 3,300명, 경남 3,300으로 경기도와 경남북에 50% 이상이 배치되었다.
1946년 4월 11일 「국립경찰조직에 관한 건」이라는 군정명령에 따라 지방경찰이 개편되었는데 경기도 경찰부가 경기도청에서 분리하여 제1관구경찰청으로 독립하였다. 관내 경찰서도 종래 지역 명칭에서 번호제를 실시, 9개의 경찰관구청이 생겼다. 경찰계급의 명칭도 경찰부장을 경찰청장으로, 경찰부차장은 경찰부청장으로 변경했으며, 중앙의 경무부장을 제외하고 시도에는 경찰청장, 경찰부청장, 총경, 감찰관, 경감, 경위, 경사, 순경의 8등급의 경찰계급이 있었다.
도경찰부와 시·군경찰서를 번호제로 한 것은 도명을 사용하는 도지사와 지방경찰의 병립적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1945년 12월 27일의 명령으로 도지사로부터 경찰권을 분리한 후 재차 독립된 행정기구로서 경무부의 통일적인 체제를 갖춘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개편은 ‘군대와 같은 명령계통을 가지고 규율적으로 복무하기 위해 경무부와 일원적 연락 아래 두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남조선 경찰을 한층 강화하고 기동적인 활동을 위한 것이었다.
미군정청은 1946년 9월 17일 3개의 경무총감부를 설치하여 관구경찰청의 조직과 활동을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하고 대대적인 인사 개편을 단행하여 중앙집권적인 경찰체제를 완성하였다. 제1경무총감부는 제1·2관구를 관할하며 본부는 서울, 제2경무총감부는 제3·6·8관구를 관할하며 본부는 전주, 제3경무총감부는 제4·5·7관구를 관할하며 본부는 대구에 두었다. 이때 단행된 인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경무총감부(서울)는 제1관구경찰청장 장택상이, 제2경무총감부(전주)는 황옥 경무총감이, 제3경무총감부(대구)는 제4관구경찰청장 박재수가 각각 보임되었다. 또한 수도관구경찰청장 장택상, 수도관구경찰청부청장 이익흥, 한종건 경무부 공안국장, 공안국부국장 장영복, 공안국공안과장 이만종, 제1관구경찰청장 박명제, 제1관구 경찰청부청장 김태일, 제2관구경찰청장 김상봉, 제관구경찰청 부청장 박병춘, 제4관구경찰청장강보성, 제6관구 경찰청장 송병섭, 제7관구경찰청장 장자관, 제7관구경찰청부청장 유금렬, 제8관구경찰청장 박승관, 제주감찰청장 김대봉, 제5관구경찰청 부청장 강수창 등이 임명되었다.
미군정 기간 내내 지방경찰의 활동과 관련해 도지사의 권한과 중앙 경무부의 지휘 통제를 놓고 계속 논란이 되고 갈등이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중앙 경무부의 통제에 따라 움직이는 단일화된 조직의 성격을 지녔다. 이는 미국인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중앙집권적 통제 아래 놓인 경찰력을 동원해 남한의 혁명 상황을 제어하고 좌익을 억누르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일제의 경찰 구조와 한국인 경찰관들을 재활동하여 경찰기구를 창설하였는데,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된 경찰기구는 주로 일제 경찰과 민족 반역자, 그리고 월남한 경찰이 중용되었다. 미군정이 마땅히 청산되었어야 할 인간들을 재고용한 것은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및 여타 좌익조직들을 한국에서 미국의 목표 실현에 방해가 되는 위협적 요소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들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서 경찰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한국 경찰은 미전술부대와 더불어 치안유지와 소요 진압의 가장 중요한 물리력으로 등장했다.
미군정은 일제의 경무국 조직을 인수, 개편하면서 일본인을 면직하고 그 자리를 한국인들로 채워나갔다. 미군정은 하급 경찰관들을 채용하기 위해 9월 16일 경찰관 강습소(10월 2일 경찰학교로 개칭)에서 채용시험을 거쳐 대거 충원하였다. 시험은 한글을 해독하고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쓸 정도면 합격했으며, 교육 기간도 3일에 불과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상 남한 치안을 책임질 이 비대한 기구의 수뇌부를 누구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미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 고문이었던 윌리엄스 소령은 10월 17일 한민당 수석총무인 송진우를 비롯하여 원세훈, 조병옥 등 한민당 수뇌부와 면담하고 반공사상이 철저한 인물을 경찰 책임자로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송진우는 한민당의 총무로 활동하고 있던 조병옥을 추천하였고, 미군정은 조병옥을 경무국장에 임명했으며, 조병옥은 군정 경찰의 조직과 간부 충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미군정 당국은 1945년 10월 21일 부민관에서 경무국 창설식을 거행했는데 당시 경무국장은 아고 대령이었고, 관방총무과장에 조병옥, 수사과장에 최능진이 임명되었다. 조병옥은 이때 미래의 경무국장으로 내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병옥은···해방 후 대표적인 친미 인사로서 공산당은 물론이고 여운형의 건준 세력과도 철저한 대립 관계를 유지했으며, 군정 경찰의 총수가 된 뒤에는 민중 억압과 좌익 탄압으로 악명을 떨쳤다. 정부수립 후에는 제주4.3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 부역자처벌 등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주요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조병옥은 ‘일본 경찰 출신이라고 모두 Pro-JAPAN(친일파)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Pro-JOB(전직)도 있었다’라며 ‘프로 재팬, 프로 잡’(‘pro-Japan, pro-Job’) 주장을 폈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운동을 방해하거나 민족운동가를 살해한 자 이외에는 일제 경찰을 ‘프로잡(pro-Job)’으로 보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이었으나, 조병옥이 등용한 인물들은 거의 사찰과, 보안과, 고등경찰계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체포에 앞장선 가장 악랄한 친일 경찰들이었다.
조병옥과 더불어 또 한 명의 경찰 지휘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장택상이다. 장택상은 1946년 1월 16일 제1관구 경기도경찰청장(후에 수도경찰청장)에 임명되었으나 그 전부터 경기도와 서울 등 수도 경찰의 조직과 활동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다. 경북 칠곡 북삼읍 오태동(현재 구미시 임오동)의 대지주 장승원(허위의 제자 박상진이 만든 대한광복회의 군자금 요청을 거부하다 살해됨)의 아들로 태어난 장택상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 중퇴하고 국내로 돌아와 활동하던 중 1938년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경찰의 조사를 받은 바 있다. 장택상은 제1관구(경기도)경찰청장이 된 뒤 청구회 사건 때 자신을 조사했던 가창현을 불러 ‘어느 시대나 자기 직책에 충실하면 높이 평가 받는 거야’라며 칭찬한 뒤 1계급 특진시켜 수원경찰서장에 임명했다. 그 후 가창현은 인천, 평택 서장을 거쳐 정부수립 후에는 서울시경 사찰과장의 요직을 맡기도 했다. 장택상은 경찰권 강화, 경찰의 대폭적인 증원, 민족 경찰의 숙청, 모든 좌익지도자의 체포 등을 가장 먼저 명령했을 정도였다.
당시 미군정관리였던 리차드 로빈슨은 ‘이 두 사람(조병옥과 장택상)을 경찰기구 최고 책임자로 임명한 후, 미군정 당국은 경찰 간부와 요원들을 충원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경찰로서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필연적으로 일제 경찰에 근무한 자들–이 오히려 선호되었다. 따라서 애초부터 경찰 간부와 사병의 대다수는 일제하에서 훈련받은 경찰 출신들이었다’라고 평했다. 또한 리차드 로빈슨은 조병옥과 장택상이 ‘경찰의 월권행위, 부패 그리고 법 집행에서 정치적 편파성의 묵인’ 등으로 인해 ‘그들에게 남아 있던 최소한의 명성마저도 파괴되고 말았’으며, ‘1947년 3월 1일 서울에서 좌우익의 총격전이 벌어지고 난 후에, 미국의 수석 경찰 고문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길, 자신은 조병옥이나 장택상이 그 사건의 전반을 치밀하게 조작한 것이라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서류철에는 이 두 사람을 몇 번씩이라도 교수형에 처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증거들이 확보되어 있으며, 또한 이 두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경찰의 무분별함을 줄일 희망은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라며 비판했다.
조병옥과 장택상의 행태를 비판하며 민족 경찰, 민주 경찰, 친일 경찰 청산을 외쳤던 이가 바로 최능진이다. 최능진은 평양 숭실중학교 졸업 후 중국을 거쳐, 미국 듀크대학 체육학과를 졸업한 뒤 안창호의 흥사단에서 활동했다. 1929년 귀국, 평양 숭실전문학교 체육학과 교수로 부임한 그는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2년간 투옥되었다. 조병옥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함께 검거되었던 동지였지만 해방 후 경찰의 진로를 놓고 심각한 갈등과 대립을 벌였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해방 후 조만식 밑에서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을 지냈으나 소련군의 진주 이후 공산당과 갈등을 일으켜 월남하게 되었다. 처음 경무국장 자리를 놓고 조병옥과 경쟁하였으나 결국 밀려 경무국 수사국장이 되었다.
최능진은 조병옥과 장택상의 친일 경찰 기용과 고문 수사를 비판하고 민주 경찰 건설을 주장하며 이들의 행태에 제동을 걸었다. 특히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민중의 불만이 거대한 10월 민중항쟁으로 폭발하게 된 것은 친일 경찰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에 최능진은 ‘경찰 인사에 있어 일제 경찰 출신, 특히 일제하에서 항일애국자를 탄압·박해하던 악질 고등경찰 출신을 해방된 오늘 경무부 당국이 등용, 특히 수사 경찰의 일선에 배치하였다. 비록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경찰 기술자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체포·고문하는 사실은 한국인의 감정을 지극히 손상했다. 그 결과는 군정 경찰에 대한 일반 민중의 반감을 사고 있으므로 이를 시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좌익의 준동을 척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절대적으로 조병옥과 장택상을 편들었기 때문에 그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런 갈등의 와중인 1946년 12월 5일 경무부장 조병옥은 국립경찰의 사기를 진작하고 명령계통을 확보하는데 유해하다는 이유를 들어 최능진을 파면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최능진은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통해 ‘소직(小職)은 국립경찰을 위하여 초지를 달성치 못하고 탐관 모리만을 전념하는 귀하에게 국립경찰을 일임하고 나아감은 양심이 허락지 않을뿐더러 3천만 민중이 허락지 않는 중차대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귀하가 추궁한 세 조건은 충분한 증거를 제시치 않고 막연히 운위함은 경찰관의 자격을 스스로 잃은 추태(醜態)라고 생각한다’라며 조목조목 반박하며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조병옥은 최능진뿐만 아니라 그와 뜻을 같이하는 민족 경찰을 모두 경찰에서 제거하기 위해 12월 8일 대규모 인사를 단행, 경무부 내에 있던 최능진 계열 간부들을 좌천시키거나 사표를 받아냈다. 10월 민중항쟁을 계기로 경찰 내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된 친일 경찰과 일제 잔재 청산 요구는 오히려 조병옥·장택상 등 친일 경찰 두호 세력의 반일·민족 경찰, 민주 경찰 세력에 대한 대량 해임과 좌천 등의 인사 조치로 실패하고 말았다.
1945년 10월 초 미군정은 서울 시내 10개 경찰서장을 임명했는데 모두 친일 경찰이나 친일 관료 출신이었다. 이 인선 작업에는 미군 대위 스털링과 해임된 뒤에도 한동안 보좌역으로 근무했던 오카 전 경기도 경찰부장, 해방 직전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이었던 최연 등이었다. 특히 최연은 식민지 시기 조선인으로서는 사실상 최고의 계급이었던 경시로서 황해도 보안과장과 경기도 형사과장 등 경찰 요직을 지냈으며, 김일성의 보천보 습격 사건 후 혜산진 사건(조국광복회 관련자들의 대량 검거 사건) 수사에서 박달 등 관련자들을 검거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해서 일제 경찰 최고 훈장인 경찰 공로 기장을 받았던 인물이다. 해방 직전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이었던 최연은 해방 직후 건준에서 일본 경찰 출신들이 모여 만든 ‘건준 경위대’를 조직하고 서울 시내 경찰서 접수에 나서자 이에 대항하여 ‘대조선경찰대’를 조직해 미군 진주 때까지 막았다.
해방 후 친일 경찰의 대부 역할을 한 최연의 보좌를 받아 미군정이 10월 초순 서울 시내 경찰서장에 임명한 10명은 종로서장 이성실, 중부서장, 손석도, 동대문서장 김정제, 성동서장 이회상, 성북서장 김일성, 서대문서장 최운하, 마포서장 박주식, 용산서장 김정채, 영등포서장 윤명운, 창덕궁서장 변종현 등 모두 친일 경찰 또는 친일 관료 출신들이었다. 서울을 제외한 21개 서장도 반은 신인이고, 반은 일제 경찰 출신으로 임명되었다. 경기도 경찰부의 과장으로 임명된 이들도 전부가 일제 경찰 간부였다. 인사권을 쥔 경무과장 최연을 비롯하여, 보안과장 전봉덕, 형사과장 홍병식, 정보과장 한승린, 건축과장 정덕현, 경제과장 문형식, 소방과장 김정배 등이었다. 독립 국가라면 민족 반역자로서 피고인석에 앉아야 마땅할 고등계 형사 최연이 인사 실무를 담당하는 경무과장을 차지함으로써 그 뒤 북한에서 내려온 친일 경찰 등 일제 경찰 간부들이 군정 경찰로 들어오게 하는 창구 구실을 담당하였다.
친일 경찰, 친일 관료 출신 군정 경찰 간부의 충원은 1946년에 들어서면서 월남한 친일 경찰과 관료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경찰 간부들의 반탁운동으로 1946년 초 서울 시내 8개 경찰서장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를 만나 경찰 총파업 등을 논의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는데 그들이 해임된 자리에 새로 임명된 경찰서장들 전원이 친일 경찰 출신이었고 거의 월남한 자들이었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인민위원회로 하여금 총독부의 행정권을 접수하게 하여 총독부의 고위 행정·사법 관료층은 물론이고 경찰관, 헌병도 모두 재판받게 하였고, 재판을 피하려고 38선을 넘어 이남으로 도피하는 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북한에서 일찍부터 친일파 경찰, 사법관료, 행정관료들을 처벌함으로써 이들이 남으로 도피하게 되어 남한의 친일파 경찰과 관료들은 더욱 넘쳐나게 되었다.
월남한 대표적인 친일 경찰관들로는 평남경찰부 보안과장 출신의 노덕술(월남 후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을 비롯하여 이익흥(내무부장관), 이호우(일제 평남 영원서장), 이하영(경기도 경찰국장), 윤우경(치안국장), 홍병희(서울시경 부국장), 김태일(수도청 부청장), 김원일(가평서장), 문석재(평택서장), 홍택희(서울시경 사찰과 부과장), 장영복(경무부 공안부국장), 박사일(경기도 경찰국장) 등 주요 간부급만 해도 수십 명에 이르러 한국 경찰의 주요 인맥을 형성했다. 이들 월남 친일 경찰, 관료들을 미군정 경찰과 관료층에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 경무부 차장이자 조병옥의 보조관이었던 최경진과 수도경찰청 보좌관이었던 최연이었다. 이렇게 해서 1946년 말까지 군정 경찰 간부 중 경위급 이상 1,157명 중 82%인 949명이 친일 경찰 출신으로 채워졌다.”
경찰이 어떻게 국민 아닌 권력의 개노릇으로 일관하며, 빨갱이로 몰아 마을 사람 전체를 불태워 죽이며, 고문으로 사람을 죽이며, 시위 중인 시민에게 물대포를 쏘아 죽이는지 소름 끼치게 실감할 수 있다. 대한민국 경찰은 여전히 조선총독부 경찰이다. 그렇게 출세한 자들 후손은 또 그렇게 동족을 개돼지로 여기며 명문가 끗빨 날리며 승승장구 살아간다. 조병옥의 두 아들이 조윤형, 조순형이다. 둘 다 민주당 계열 사람으로서 육중한 정치적 지위를 점했던 자들이다. 대한민국은 이런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