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共絃)

-숙의의학 소설-

by 강용원


경험에서 오지 않았다면 그 무엇도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지만, 경험하지 않으면 제대로, 아니 전혀 알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말은 진실이다. 몸으로 알아야 할 일이 무엇보다 그러하다. 몸에 가까운 앎일수록 경험은 육중한 표지다.


감정은 근본적으로 직접적인 몸 느낌 파동 정보다. 그 직접적인 몸 느낌에서 비롯하여 겹과 결이 다양하게 갈라져 나갈 뿐이다. 공포-불안-공황은 가장 직접적인 의 감정에 속한다. 병리적 공포-불안-공황은 간접 경험이나 이론으로는 전혀 앎이 일어나지 않는 감정이다.


ㅂㅇ는 한숨과 한숨 사이로, 나직나직 속삭이듯, 재빨리 말하는 ㅎㅅ와 띄엄띄엄 몇 달 동안 상담한 적이 있다. ㅎㅅ는 출생 직후부터 10대 초반까지 어머니 아닌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연속과 인정, 그리고 수용으로 이어지는 모성은 그에게 그리움과 원망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ㅎㅅ는 단절과 부정, 그리고 거부가 몰고 온 공포·불안, 고립, 무력감에 휘말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학령기 이전부터 시작된 정신장애는 청년 초기 정점을 찍었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 과정에서 가족은 ㅎㅅ가 못 박혀 있는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소심하고 무능해서 그러니 다 제 팔자지 어쩌겠나, 정도로 방치했다.


ㅎㅅ는 끊임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나는 버려졌습니다, 나는 (이 사회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남들은 나를 모릅니다, 모르면서도 나를 비난합니다, 나는 순수하고 진실한데 세상은 부조리합니다.······”


ㅂㅇ는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면서 조목조목 딱 하나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정말 그렇습니까?”


처음에는 화를 내며 아, 정말이라니까요, 하더니 점차 ㅎㅅ는 ㅂㅇ가 하는 질문 실체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아닌 줄 다 압니다. 그런데 아는 대로 움직일 수가 없네요.”


ㅂㅇ는 그렇지 않은 맞은편 진실을 단순명료하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세상 쪽으로 돌아서는가 싶더니 ㅎㅅ는 어느 날부턴가 홀연히 발길을 끊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돌아보면서 부족한 점이 무엇이었는지 ㅂㅇ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사실 그 무렵까지 마음 치유하는 의자로서 지녀온 관심사와 감각은 우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경험이 가져다준 알토란같은 앎으로 말미암아 우울은 훤히 들여다보였다. 아픈 사람 체취만으로도 우울장애 유형을 알 수 있었다. 아픈 사람 마음결에 스미듯 깃들 수 있었다. 그들 눈길이 머무는 곳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불안 쪽은 사뭇 달랐다. 중간 정도 고소 공포를 제외하고는 공포·불안 계통의 병리적 경험이 없었던 탓에 기본 감각과 공감 능력이 우울장애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졌다. 약물치료만 하면 되는 정신과 양의사라면 크게 문제 될 일 없지만 숙의,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상호소통을 하려는 그로서는 여간 답답한 노릇이 아니었다. 이론적 대응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라, 막막해서 두려운 상황이 그때그때 연출되었다. 이런 동요는 분명히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으리라.


ㅎㅅ와 더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한 자책감에 잠겨 있던 어느 날, ㅂㅇ게 하늘이 주신 기회가 찾아왔다. 공권력이 느닷없이 공격해오는 바람에 제법 긴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공포·불안에 시달리는 사건이 터져버렸다. 보건복지부를 포함한 여러 관공서를 드나들며 겪은 공포·불안은 어린 시절 가족 간에 겪은 바와는 결이 달랐지만, 그 뒤 공포·불안 스펙트럼 환자들과 마주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ㅎㅅ를 지금 만난다면 어떨까, ㅂㅇ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 나눈 대화가 마냥 무용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변화에 가 닿는 공현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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