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보조 이야기 130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by 강용원

반제국주의 의학 서사 43



코 문화철학


인간 사유는 언어적 표현 안에서만 가능하다. 언어적 표현을 통해 사유가 이끌려 나오기도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반 현상은 사유 결과가 언어적 표현을 통해 나오는 형태다. 일반적으로 쓰는 언어적 표현을 보면 주의하고자 하는 대상에 관한 그 시대 사유를 알아차릴 수 있다.


코에 관한 퍽 친숙한 언어적 표현으로 ‘개 코’란 말이 있다. 냄새를 아주 잘 맡는다는 뜻으로 쓰는데 이 말이 주는 어감은 애당초 그리 좋지 않다. 나중에는 욕설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다. 코에 대한 부정 언어학은 비단 이뿐 아니다. 코 묻은 돈. 코 빠뜨리다. 코 꿰이다. 코가 석 자다. 코 떼어 주머니에 넣는다. 코 아니 흘리고 유복하랴. 콧구멍 같은 집에 밑구멍 같은 나그네 온다.···다른 감각기관에 비해서 긍정적 표현이 현저하게 적다.


코에 대한 이런 인식은 아마도 냄새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냄새, 또는 냄새 맡는 기능이나 행위에 대한 평가가 그대로 코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냄새란 말 자체가 이미 좋지 않은 느낌을 간직한 채 사회문화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향기”라는 한자어와 기능이 수직 분화되어 정착된 현상을 보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냄새난다”라는 표현도 당연히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른다. “향기롭다”와 대조하면 대뜸 알 수 있다. “냄새 맡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범죄자들의 직감을 표현하는 비유로 동원한다. 이처럼 냄새는 좋은 수식어, 예컨대 “엄마”가 붙지 않으면 좀처럼 좋은 뜻으로 읽히지 않는다.


이는 순우리말에 대한 우리 사회에 특유한 자학 현상만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냄새 자체에 대한 사회문화적 태도가 반영됐다는 말이다. 우리말을 보면 들어보다, 맛보다, 만져보다, 맡아보다, 와 같이 모든 다른 감각 위에 시각이 있다. 우리 사회문화적 전통은 시각만 못 하지만 청각 역시 매우 중요한 감각으로 인식해 왔다. 경청이란 표현도 그렇고, “귀가 보배다.”라는 속담도 그렇다.


물론 우리보다 서구사회가, 근대 이전보다 이후가 훨씬 더 치우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 독재”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18c 이후 이성은 감성-감성은 감정을 퍼텐셜 측면에서 이해한 표현으로 여기서는 감정과 동의어로 씀-을 계몽 대상으로 발아래 둔다. 감성은 동물적, 원시적, 여성적 본능 영역으로 비하된다. 여기서 이성에 속하는 감각은 시각, 청각, 촉각이다. 감성에 속하는 감각은, 당연히 후각과 미각이다. 그런데 미각 80% 이상이 후각이므로, 결국 이성 독재 시공간에서 희생양이 된 감각은, 실질적으로 오직 후각, 그러니까 코다.


후각 폄훼 철학적 흐름 선두에, 정상에 섰던 사람이 바로 칸트다. 그는 시각, 청각, 촉각은 객관적 능동적 감각이고, 후각(따라서 미각)은 주관적 피동적 감각이라고 구분 지었다. 전자는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고, 후자는 강요되어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후자는 혐오 대상이다. 주체로서 이성을 구축하고자 했던 그에게 이 구분은 너무나 당연했다.


물론 오류 무아지경, 무지 삼매경 맞다. 그러나 칸트는 절대군주였다. 칸트가 구축한 이런 강박적 이성 독재는 헤겔 중립화와 포이어바흐 복권을 거쳐, 니체 돋을새김이 있기까지 전 유럽을 지배했다. 니체는 후각이야말로 진정한 쾌락 전령이며 공감, 직관적 통찰, 자비심, 윤리 의식, 자기성찰 기원이라고 갈파했다. 그러나 아직도 니체가 행한 칸트 해체는 비주류 딱지를 완전히 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서양 철학사에서 그리 새롭지 않다. 아폴론 전통과 디오니소스 전통 사이 대칭성, 그 대칭성 파괴를 둘러싼 유구한 에피소드 근대 버전일 뿐이다. 이성 독재 길고 긴 세월 동안 코는 그야말로 숨 쉬는 도구로, 그러니까 당연히 있는, 배경 같은 존재로, 더군다나 텅 빈 구멍으로 소외당해 왔음이 사실이다. 후각, 그러니까 감성을 ‘쌍것’ 취급하는 전통의 결과다.


이런 관성은 진화론적 뇌 과학에 큰 빚을 지고 있다. 파충류 뇌에서 포유류 뇌로, 그리고 영장류 뇌로 진화하면서 본능-감성-이성·의지 계층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뇌 과학 이론 말이다. 전반적인 이야기 흐름을 이해하지 못할 바 없다. 하지만 나중에 생긴 생명이 고등한 생명이라는 식 발상은 동의할 수 없다. 진화라는 표현 자체에 이미 선형적 발전 인식론이 전제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변화가 다 발전이지는 않다. 달라진 삶 조건에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는 양상일 따름인 변화를 모두 진화·발전으로 보는 일은 서구 직선적 또는 종말론적 시간관 투영이지 싶다.


이런 프레임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거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생명에서 가장 본질적인 무엇이 생긴 뒤, 생명현상을 더욱 유연하고 풍요롭게 하려고 비본질적, 부차적 기능들이 생겨났다고 말이다. 비본질적, 부차적인 기능이 인간 특징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여기는 생각을 딱히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무엇을 혐오 대상으로 삼는 생각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 건강할 때든, 병들었을 때든, 치료할 때든, 감성, 곧 후각은 그 어떤 감각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이성과 감성이 극단적·순간적으로 맞물릴 때, 감성이 이성을 제압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감성은 자연이고, 자연은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당위이고, 당위는 요청이기 때문이다. 근대정신이 이성을 왕으로 옹립하려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 왕 정체가 드러났다. 그 왕은 당나귀 귀를 가졌다!


선입견을 내려놓고 생각해 보면 인간 생명은 감성에서 시작하여 감성으로 끝난다. 인간 모든 정신 현상 중심과 경계에는 감성이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말하는 감정은 감지(感知) 감성이다. 흔히 말하는 이성은 이지(理智) 감성이다. 흔히 말하는 의지는 지향(志向) 감성이다.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 아니 참된 왕이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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