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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Mar 26. 2024

나나보조 이야기 191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15   


       

아침에 받아 저녁에 돌려주다   

  

다시없을 일이다. 3-1은 순도 99.99% 우울장애 전형이다. 모든 우선순위가 타인에게 있다. 모든 중심이 타인에게 있다. 그는 언제나 맨 뒤에서 주춤주춤 따라 걷는다. 그는 언제나 변두리에 서 있으면서도 늘 자신을 떠나고 있다.  

    

3-1은 미안하다는 말을 무수히 되풀이한다. 어째서 미안하냐고 물으니, 서슴없이 대답한다.  

   

“못나서요.”    

  

그는 자신이 못나서 부모에게도 형제자매에게도 미안하다고 한다. 그 말이 얼마나 절절하던지, 처음에 가슴이 먹먹하다가 나중에는 부아가 치밀어 올라온다. 부아를 삭이면서 0 또한 절절한 심정으로, 뭐가 어떻게 못났는지 묻는다. 그가 웅숭깊게 대답한다.  

   

“태어난 자체가요.”   


        

내 팔목, 아니 팔에는 무려 20개가 넘는 칼자국이 있다. 미안해서, 못나서, 나는 긋고 또 긋는다. 긋는 찰나 들이닥치는 날카로운 통증이 나를 살리고 또 죽인다.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이나 유령인 채, 나는 잘난 사람들 언저리를 떠돌고 있다.      


치료받는다는 사실도 미안하다. 돈이 없다는 사실도 미안하다. 그냥 와서 치료받으라고 간곡히 권하는 0 선생님께도 미안하다. 모두 내 못난 탓이다.   

   

내가 오늘 들고 갔던 카드는 여동생의 카드다. 그 여동생은 내가 너무나 자랑스러워해서 수없이 꽃을 선물했던 여동생이다. 그 여동생에게서 아침에 받았던 그 카드를 나는 저녁에 돌려주었다. 0 선생님을 다시 뵙는 일은 없다. 그뿐이다.  


        


깃발  

   

정신장애 진단과 통계 편람(DSM-5)이 기분(mood)장애로 분류하지 않았다고 해서 미국 정신의학 협회가 우울장애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본질을 잘 모르고 있다. 우울장애는 “자기부정 증후군”으로서 자기 자신을 우선순위에 두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지도 않음으로써, 늘 타인 기준에서 타인 이익을 위해 파괴적으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정신장애다. 본령에 터 잡지 않는 피상적 진단으로 우울장애 낙인찍힌 사람들이 각종 약물에 시달리다가 0을 찾아오는 일이 드물지 않다.  

    

20대 초반 나이에 처음 왔을 때, 3-2는 자신을 전형적인 중증 우울장애 환자로 굳게 믿었다.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며 이곳저곳 정신과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수없이 들은 병명이었으니 당연하다. 거기다 정신과 치료 과정 어디선가 자기애성 인격장애라는 기분 나쁜 진단 소견을 듣고 격렬하게 반발했던 경험이 더해졌다. 자기애라니, 어디서 순 돌팔이 같은 새끼가··· 

    

3-2는 어머니가 어떻게 거듭해서 자신을 버렸는지, 아버지가 어떻게 무심하게 그 일을 방조했는지 세밀하게 묘사했다. 친척과 지인들이 어떻게 아픈 자신에게 무관심했으며, 심지어 악의적으로 자신을 공격했는지 에피소드별로 드라마처럼 설명했다. 자신이 그들에게 얼마나 힘들여 마음을 열고 다가갔는지, 얼마나 희생적으로 그들에게 잘해주었는지 대비시키는 일을 잊지 않았다. 마치 이 부분을 말하지 않으면 결코 우울장애 환자일 수 없기라도 하듯.   

  

3-2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달리 특별히 아프며, 다른 사람보다 더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받으려 줄기차게 시도했다. 그는 그 사실을 무조건 끝까지 지지해 주는 완벽한 사람을 찾아 헤맸다. 0은 그렇게 생각하는 그 마음 상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였다. 물론 3-2가 그런 질병 실재를 지녔다고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 차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그는 집요하게 0을 공격했다.    

  

“내가 심각한 우울증인데 선생님은 왜 계속 무시하시는 겁니까?”  

   

0은 나지막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기 아픔을 깃발로 휘두르는 사람은 우울장애에 빠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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