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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Mar 30. 2024

나나보조 이야기 195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19    


      

화학 수업  

   

세상 사람은 대개 딱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남이 내게 잘해주면 ‘나도 잘해줘야지.’ 하는 사람이다. 다른 한 부류는 남이 내게 잘해주면 ‘넌 내 밥이지.’ 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사냥감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다. 후자는 사냥꾼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쌍둥이를 낳고 키운 첨단 제국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후자가 되기 위해 질주한다. 후자는 전자를 수탈함으로써 더욱 향락에 중독되어 간다. 향락에 중독된 사회는 모든 영역을 포르노로 영락시킨다. 포르노 사회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더욱 선하고 의로우며 아름다움으로 는적는적 뭉그러져 간다.    

  

40대 중반인 나는 전형적으로 선하고 의로우며 아름다운 사람이다. 정도가 지나치다고 표현하면 더 좋을 듯하다. 내가 직장 상사한테 가혹하게 수탈당할 뿐만 아니라, 동료들한테도 이를테면 경원 대상인 사실을 증거로 들 수 있다. 사실 내가 0을 찾아간 이유가 바로, 직장생활이 주는 스트레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내 상사는 불의한 권력이 투하한 낙하산이었다. 낙하산답게 무소불위 ‘갑질’을 통해, 스스로 양아치임을 보여주었다. 퇴근 후에도, 공휴일에도, 전화로 내게 업무를 지시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직위를 강등시켜 한직으로 내몰았다. 하급자를 직속상관으로 임명했다. 상급자인 내 책상을 최하급자 옆에 붙여 배치하였다. 이 모든 부당한 처사를 지켜본 동료들 가운데 내 편에 서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 사회 일상이다. 마침내 그 상사가 쫓겨났다. 새로운 상사가 부임했다. 상황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나는 3-7이 풀어 놓은 이 모든 이야기를 들으며 그와 함께 상사, 나아가 그런 자들이 거머쥔 세상과 직면하는 일을 숙의했다. 작게는 자잘한 싸움 기술에서부터 크게는, 세계 구성과 운동 이치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가로질렀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문제를 전체 맥락 안에서 인식하는 능력, 그리고 자기 자신과 삶을 대하는 자세 이야기였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성찰은, 고통이 지속될 때 그 힘이 어떤 쏠림에서 나왔는지 살피고, 그 쏠림에 사로잡힌 자신을 알아차리는 일에서 시작한다. 쏠림을 맑게 들여다보면, 건너편이 보인다. 건너편으로 시선을 옮겨 문제를 다시 바라본다. 3-7은 한사코 문제를 상사에게 들러붙은 추악함과 불의만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그럴 뿐이라면, 그 불의·부도덕이 왜, 하필, 3-7에게만 나타날까가 설명되지 않는다. 이때, 문제 소지가 그 자신에게도 있지 않은가, 질문해야 한다. 이 전환이 양비론이나 물타기와 전혀 다른 일임은 물론이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하면, 비로소 문제를 전체 맥락 안에서 인식하는 능력이 생겨난다. 어떤 문제에서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통당하는 경우 대부분은, 문제 전체 맥락을 몰라서 생긴다. 그 상황에서는, 해결책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늪으로 빠져든다. 부분에 집중하는 모든 행동은 포르노며 중독이기 때문이다. 전체 맥락에서 보면, 문제를 느끼는 감정 상태가 유연해진다. 감정 상태가 유연해지면, 해결 또는, 해소의 새로운 시야가 열린다.   

   

새로운 시야란 무엇일까? 물소 떼를 공격할 때, 사자는 가장 약한 개체를 선택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공격당하는 약자는, 본능적으로 공격하는 강자의 면모에 제압되어, 거기에 시선이 고정되기 마련이다. 거기에 사로잡히면, 헤어 나올 길은 전혀 없다. 자기 치명적 약점을 간파하고, 근본적 대책을 세우는 일이 유일한 길이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한다는 말은 결국, 여기로 향한다: 나를 괴롭히는 상사가 수많은 부하직원 가운데, 왜 하필, 나를 선택했는가? 내 치명적 약점은 무엇인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쌍둥이를 낳고 키운 첨단 제국주의 사회는 삶을 승패 문제로만 규정한다. 선할수록, 의로울수록, 아름다울수록 연전연패한다. 삶이 승패 문제만은 아님이 진리일지라도, 연전연패하고 살아남을 자, 누군가. 내가 진즉 직면했어야 할 대상은, 삶이 승패 문제이기도 하며, 살아남으려면 적절한 승수가 필수적이라는 냉정한 현실이다. 승수를 쌓는 데 필요한 바는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 따위 ‘순물질’이 아니다. 수완, 승부욕, 권모술수 같은 ‘불순물’이다. 내면에 불순물을 들이지 않고 순물질로 살다가 끝내 사냥감으로 생을 마친다면, 그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은 대체 무엇인가? 제 목숨 하나 지킬 수 없는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이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이기는 한가? 이들이 다름 아닌, 치명적 약점 아닌가?   

   

결국 문제는 자기 자신과 삶을 대하는 자세로 귀착된다.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에 강박적으로 집착함으로써 도리어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을 파리하게 만들어, 내면 온기를 떨어뜨리면, 사냥꾼이 그 서늘함을 감지하고 정조준하게 된다. 인간 약함을 끌어안고 십자가를 지는 메시아가 아닌 한, 자기 내면 온기를 떨어뜨리는 짓은 다만 자해행위일 따름이다. 내 상사가 지닌 추악함과 불의는, 결코 홀로 작동하지 않았다. 내 자해행위와 맞물려 돌아갔다. 이 진실을 냉엄하게 직시하고, 나는 나 자신을 대하는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0이 내게 간곡히 당부했다.  

       

“남에게 온기 주려고 내 체열부터 빼내는 일, 인제 그만두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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