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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Apr 22.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14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37       


   

구르미 그린 달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문제에 치명적으로 취약한 8-5가 찾아왔다. 타고났는지 어떤 트라우마 때문인지 알지 못하지만, 근거로 삼을 만한 일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서 격리되었다. 7살이 될 때까지 할머니가 그를 길렀다. 극단적인 애지중지, 방치 둘 중 하나였음은 안 봐도 비디오다. 다 알아서 해주거나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현실에서 아기가 판단하고 선택할 무엇은 존재할 수 없었을 터. 주위 사람들이 하면 따라 하는 습성이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그 상태를 문제로 느껴 정색하고 고민조차 전혀 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일대 파국 위기에 직면했으니 말이다.  

    

형식만 남았을 뿐, 8-5는 사실상 혼인 상태였다. 그 와중에 그는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맺었다. 배우자가 그 사실을 알아서 문제 삼을 때까지 그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배우자가 분노와 배신감에 떨며 피폐해지자, 그도 자기 상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실시간으로 내 동선을 배우자에게 보고했다. 내 결백한 생활을 증명함으로써 신뢰를 회복하고자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배우자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이미 신뢰가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하는 행동을 뭔가 숨기려는 계략으로 받아들였음이 틀림없다. 이른바 편집장애로 치닫고 있었던 셈이다. 0 선생은 묵묵히 내가 보는 앞에서 그림 하나를 그렸다. 달을 그리는데 달의 윤곽을 먼저 잡지 않고 주위에 있는 구름을 채색했다. 채색되지 않는 부분이 자연스럽게 남아 달의 모양을 갖출 때쯤 내 눈은 자연스럽게 동그랗게 떠졌다. 이른바 홍운탁월(烘雲托月) 기법. 그가 말했다.   

  

“변방에 답이 있습니다.”  

   

성(적 결백)이라는 문제 중심에 배우자 부정적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으므로, 거기를 건드릴수록 불에 기름을 붓는 역효과만 내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다, 변방을 울려 중심이 비워지도록 해보라고 말했다. 그가 물었다.   

  

“배우자가 평소 바라던 8-5씨 모습은 뭡니까?”  

   

지성적인 풍모였다고 대답했다. 그는 책 하나를 추천해 주었다. 독후감을 정성스레 써서 배우자에게 읽어주라고 했다. 결과는 과연 ‘엄지척’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소소한 일상 길목을 돌며, 차근차근 배우자 신뢰를 쌓아가라고 0은 재삼재사 당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8-5가 보내는 낭보가 쌓여갔다. 마침내, 어느 날, 그는 배우자 손을 잡고, 표표히 하산했다. 나는 결혼식 초대를 정중히 사양했다. 그들이 먼저 초대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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