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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May 09.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29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51 


         

예정부조화설  

   

서울대증후군. 이것은 내가 임상 경험을 통해 이름 지은 정신장애 가운데 하나다. 서울대학교 학부 또는 대학원에 입학한 직후에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 일이나 사람을 대할 때 느끼는 두려움, 힘없음, 의욕 없음, 관심사 없음, 즐거움 느끼지 못함, 지쳤다는 느낌, 쉽게 피곤해짐···우울장애 범주에 넣을 수밖에 없는 상태다. 이런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대뜸 의문이 들 터이다. “아니, 서울대학교씩이나 갔으면서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다니?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나?”


대체 왜 이런 생각과 감정에 휘말릴까? 상식적으로는 성공 뒤에 오는 허탈감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 식이라면 모든 성취 뒤에 이런 증상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본디 모습을 되찾는 게 맞다. 치료받아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면 여기에는 다른 요소가 깊숙이 개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문제와 맞닥뜨렸던 서울대학교 학생 11-5와 숙의를 진행했다.   


        

나는 먼저 명문 사립대학교 두 곳에 합격한 상태에서 최종적으로 서울대학교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때 감정 상태를 돌이켜보면 별다른 기쁨을 느끼지 못했음이 확실하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왜 그랬는지 설명해 보라는 0 선생의 말에 나는 막막해졌다. 한없이 머뭇거렸다. 그가 웃으며 물었다.


“무조건 서울대로 가야 해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맞습니다. 언제나 제게는 선택 여지가 없는 삶이 지속되었거든요. 죄다 이미 정해져 있었죠. 그 사실이 절 숨 막히게 했고, 한없이 공허하게 했습니다.”



한 마디로 11-5 삶에는 11-5 자신이 빠져 있었다. 국가가 만든 입시제도, 사회적 분위기, 학교와 부모의 집착 등이 일사불란하게 강요하는 편향된 가치가 그 주체적인 삶을 박탈해 버렸다. 입시가 끝나고 해방되었을 때, 해일처럼 들이닥친 수치심과 무기력감이 그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숙의 초반에 확인해 보니 그는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신속하게 결정을 내리는 힘이 부족하며, 안정적으로 계획하고 조직하는 힘이 떨어지는 경향성을 보였다. 타고났을 수도 있지만 생애 초기에 입은 트라우마 탓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만 2살 이전, 어린이집 종일반에 보내졌다. 양육 주요 부분에서 부모, 특히 어머니가 빠져버린 사고였다. 10대 초반, 크게 교통사고를 당했다. 수술을 받고 2개월 동안 입원해야 했다. 0 선생에 따르면 수술도 사고다. 10대 후반, 진학·전학을 둘러싸고 겪은 스트레스 때문에 6개월 동안 우울장애 약물치료를 받았다. 0 선생에 따르면 우울장애 첫 치료를 약물로 하는 일 또한 사고다. 이렇게 점철된 중대한 사고들이 내 심리 전반을 왜곡하였음에 틀림없다.  

    

왜곡 갈피를 찾아가며 나와 0 선생은 15개월에 걸쳐 고통과 삶을 숙의했다. 있는 그대로 느낀다, 문제를 문제 삼는다, 나 자신에게 예의를 지킨다, 고유한 내 콘텐츠를 고민한다, 고유한 내 삶 그 너머를 본다, 절박함·절실함 감각을 터득한다, 반걸음 앞을 보고 한 걸음 내디딘다, 이 순간을 알아차린다, 바꿀 수 없다면 내 스타일로 받아들인다, 근원에 육박한다, 전복하고 또 전복한다, 나 자신에게 기도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늘 어렵기만 하던 아버지와 대화를 통해 휴학 동의를 얻어냈다. 외국 여행을 다녀왔다. 자신과 삶을 보는 눈이 천천히 빠르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11-5가 어느 날 설거지한 사기그릇처럼 반짝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여전히 느릿느릿 머뭇머뭇 살더라도 자기 삶에서 스스로를 우선순위에 두고 타인에게 배어들 수만 있다면 족하다, 여긴다. 뜬금없이 내 앞에 나타나 더듬더듬 아재 개그라도 날려주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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