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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May 11.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31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53 


         

우울증은 피부병이다 

    

“저는 아토피입니다.”  

   

11-7은 자기 존재를 그렇게 이름했다.

    

“저는 스테로이드로 살아왔습니다.”   

  

11-7은 자기 인생을 그렇게 매겼다.  

   

아토피는 재앙에 육박하는 피부질환이다. 재앙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닌 까닭은 아토피 때문에 삶 전반이 무너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삶 전반을 무너뜨릴 만큼 치료가 쉽지 않은 곡절이 있다. 아토피는 단순한 피부질환이 아니다. 아토피는 소화기관, 특히 장 병리 상태, 더 나아가 정신 병리 상태와 직결된다. 사실 생명 진화 이치로 따지면 피부가 첫째 ‘뇌’, 장이 둘째 ‘뇌’, 뇌는 맨 나중 ‘뇌’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아는 피부다.  

    

11-7이 자신을 아토피라고 이름한 사건은 의미심장하다. 얼마나 절실하고 절박한 문제였는지, 내가 그에게 디디에 앙지외 『피부 자아』라는 책을 보여주자, 책 제목만 보고도 눈물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진실을 알 리 없는 통속한 의료인과 부모가 그에게 제시한 치료는 시종일관 그 자아와 인격을 무시하고 피부 밖에서 틀어막기만 하는 폭력적·유기(遺棄)적 방식이었으니 말이다.   


        

통속한 의료인과 부모를 등에 업은 스테로이드는 내 피부를 속였고 장을 소외시켰으며 정신을 망가뜨렸다. 비싼 스테로이드 사 나르는 일만을 자랑으로 여긴 아버지는 내게서 사랑, 신뢰, 기대 따위를 죄다 거두어버렸다. 자기 욕망을 투사하는 도구로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호소통을 철저히 차단했다. ‘씻지 않으니 그 모양이지.’ 따위의 일방적 모욕으로 결정적 길목을 지켰다. 긁으면 야단을 쳤다. 힘들다고 말하면 격분을 발했다. 아마도 ‘버렸다’는 말이 가장 핍진한 표현이리라.  

    

버려진 자가 겪는 백전백패는 곳곳을 파고들었다. 도저히 숨 쉬고 살아갈 수가 없었다. 모든 어두운 감정 끄트머리에는 ‘죽어야 한다’가 도사렸지만 죽음 그림자만 어른거려도 와락 공포가 밀려들었다. 눈앞에 아무도 없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다. 홀로 잠자리에 누우면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마침 좋은 사람이 곁에 있어서 도망치듯 혼인했다.   

   

배우자 또한 구세주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그걸 바라고 한 혼인은 아니었지만, 배우자와도 허다히 충돌했다. 의지할수록 원망이 느는 나, 보듬어 안을수록 단단한 벽을 느끼는 배우자,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연유산을 겪으면서 우리는 더욱 피폐해졌다. 공격도 방어도 이루어지지 않고 한없이 움츠러드는 극한 상황에 이르자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새로운 길을 찾기로 하고 나는 0 선생님을 찾아갔다.    


       

이야기하다가 우는지 울다가 사이사이 이야기하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울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흐느낌이었다. 내가 어느 순간 톡 하고 숨통을 틔워주었다.   

  

“숨죽이지 말고 엉엉 소리 내어 우세요.”  

   

그 말 듣기를 한평생 기다려 온 사람처럼 11-7은 즉각 통곡 폭포 아래로 뛰어내렸다. 통곡을 들으며 특히나 가슴 아팠던 까닭은 그 울음소리 속에는 고통에 겨운 신음이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설움과 응어리를 머금은 그 소리는 엉엉 소리 사이를 톱으로 썰 듯 비집고 나와서 내 억장을 무너뜨렸다. 화장지 상자를 끌어안고 한참 울더니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그가 말했다.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긁어도 안 되고, 힘들다고 말해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어찌 소리 내어 울 수 있었겠는가. 통곡할 수 없어서 악화한 것은 아토피만이 아니었다. 우울증도 무저갱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제는, 흐느낄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 애도함으로써 거기 사로잡혔던 옛 자아와 결별해야 한다. 30여 년 저주로 들러붙어 있던 흐느끼는 자아를 베고서야 새 아침을 맞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숙의를 마치고 나와 11-7은 밥을 먹으러 근처 식당으로 갔다. 음식을 시켜 놓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불쑥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불쑥’이 아니라 통곡 뒤에 따라오는 해소(解消) 제의(ritual) 같은 절차다. 내가 그 제의에 동참하고자 제물 하나를 준비했다.

     

“나를 아버지라 가정하고, 하고 싶은 행동을 해보세요.”   

  

그 눈빛에서 파란 불꽃이 일었다. 전광석화로 내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다음 찰나 내 손가락 두 개가 그의 입 속에 들어 있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솟아오르나 싶더니 이내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는 사부작거림 없이 냅킨으로 그 피를 닦아냈다. 여전히 그 눈에서는 파란 불꽃이 일고 있었다. 다음날, 그는 밴드 한 통을 사 들고 나타났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나를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다. 내가 아토피 치료 받는 기나긴 과정에서도 아버지는 늘 부재 존재였다. 그 상황은 아버지 한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아버지는 이를테면 좌절한 수재였다. 평생 그 한을 자식 통해 보상받고자 골몰했다.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집착이었다. 나는 아버지 우울 속으로 발맘발맘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진실은 비대칭 대칭이니까 말이다.  

    

숙의를 마치고 나와 0 선생님은 밥을 함께 먹은 다음 노래방으로 향했다. 선생님은 당신 애창곡이라며 노래를 한 곡 불러주셨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방랑의 길은 먼데

충청도 아줌마가 한사코 길을 막네.

주안상 하나 놓고 마주 앉은 사람아.

술이나 따르면서, 따르면서 네 설움 내 설움을 엮어나 보자.  

    

오기택이 부른 <충청도 아줌마>라고 하는데, 전에 들은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노래 끝내고, 선생님은 무섭고 아프고 슬픈 당신 이야기를 자분자분 내게 해주셨다. 꼭 같은 무서움과 아픔, 그리고 슬픔으로 선생님과 나는 부둥켜안았다. 함께 대성통곡했다. 선생님도 나도 그날 온전히 죽어 온전히 새로 태어났다.  


         

11-7과 나는 지금도 여전히 생사의 동지다. 언제라도 그와 노래방에 가면 함께 노래한다.     

“네 설움 내 설움을 엮어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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