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용원 May 30.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47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14   


        

능동 휴식 

    

여느 때처럼 청소하고 나무와 풀에 물 준 다음 빨래하기 위해 일기예보를 본다. 소나기도 오고 대략 흐린 날씨가 예상된다고 한다. 빨래를 미룬다. 그나저나 이른 아침인데 벌써 기온이 30도다. 숲에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도봉산 원도봉 계곡에서 들어가 회룡 계곡을 돌아 원효사 품은 계곡으로 나오는 계획도 미룬다.  

    

느지막이 출발해서 광화문 교보로 간다. 다이애나 베리스퍼드-크로거가 쓴 『나무를 대신해 말하기To Speak for the Trees』를 인문 서가에서 발견한다. 내가 최근 들어 극진하게 관심 기울이는 바에 관해 뭔가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어 얼른 집어 든다. 설렘이 익도록 기다리면서 천천히 걸어 도심 나무 순례에 나선다.  

    

중학천 버드나무 길에서 시작해 수송동 소나무, 뽕나무, 회화나무를 보고 간다. 조계사 회화나무, 백송, 그 옆 우정국 회화나무를 돌아 율곡로를 따라간다. 일제가 잘라버린 창덕궁·창경궁과 종묘를 다시 이어놓은 언덕을 돌아 창덕궁 회화나무, 돈화문 옆 은행나무, 원서공원 회화나무, 마침내 관훈동 회화나무에 이른다.  

    

단골 안동국시 집으로 들어가 막걸리부터 시킨다. 아스파탐은 물론 심지어 천연 감미료조차 넣지 않았다는 막걸리 맛이 고소하고 부드럽다. 홀 매니저가 웃으며 선생님 막걸리 오늘부터 바꾸시겠네요, 한다. 아스파탐 자체도 문제거니와 제국주의 기업 몬샌토 독점이라 혐오스럽던 차에 아주 잘 됐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럴 때 갈 곳은 달리 없다. 인사동길, 감고당길, 정독도서관 서쪽 담을 끼고 난 북촌로, 그리고 삼청동 길을 지나 백악산으로 들어간다. 청와대 전망대에 다시 선다. 큰절 올리고 이번에는 푸들 말고 주인, 그러니까 조·중·동, 특히 방가 일족 향해 ‘축원’ 진언을 더욱더 간절하게 올린다. 소나기가 쏟아진다. 그냥 맞는다.  


    

내 일요일 휴식은 이렇게 걷기와 결합한 제의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사실 평일 직업 행위보다 몸은 더 고단하다. 대부분 산 숲길을 10km 이상 걷기 때문이다. 마음은 겹겹이 결결이 맑고 탱탱해진다. 제국주의와 부역 세력에 맞서는 영적 전쟁을 비인간 생명과 더불어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팡이실이 능동 휴식이다.   


   

내력 담은 장소곡절 품은 풍경

     

제2차 회룡 계곡 사건은 여전히 내 몸과 마음에서 현재진행형이다. 몸은 아직 여러 군데 상처를 끌어안고 있다. 길 없는 숲으로 들어가는 찰나에는 어떻게 그리 서슴없어지는지, 바위벽에서 굴러떨어지는 순간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면서도 어떻게 다시 그런 행로를 밟아가는지, 직진 불가 절벽 끝에 섰을 때 들이닥치는 아뜩한 순간을 어떻게 가로지르는지, 지금도 ‘내가 죽으려고 용을 썼지’ 하며 살 떨곤 한다.  

    

2023년 8월 20일 일요일 아침, 나는 가장 익숙하고 안온한 경로를 생각하며 지난주 사건을 짊어진 채인 심신과 포옹한다. 아내와 딸이 나간 뒤 적당히 휴식을 취한 다음, 가벼운 걸음으로 광화문 교보를 향한다. 광화문 교보는 ‘읽는 인간’으로서 내가 마음 모신 지성소다. 책만 보지는 않는다. 버드나무 책과 의자 조각, 그리고 5만 살 나무 책상과 인사하는 일을 빼먹지 않는다.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를 사 들고 도심 나무 순례를 거친 다음 북촌으로 향한다. 그럴 생각 없었는데 정독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몇 차례 대강 둘러본 기억 위에 샅샅이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얹어져서다. 

     

느닷없는 생각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내가 본 측백나무 중 가장 큰 측백이 입구 비탈길에 서 있었다. 수백 살 회화나무도 거기 있었다. 80살 등나무도 있었다. 안쪽에 보호수로 지정된 4백 살 이상 된 회화나무가 또 있었는데 커다란 벌집을 거느렸다. 서쪽 끄트머리쯤에는 처음 본 수양벚나무도 가지를 늘어뜨린 채 무성히 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뒤로 더 깊이 들어가니 우물 돌이 있는데 그 옆 안내판은 이 땅이 김옥균, 서재필 소유였다가 나중에는 매국노 박제순 손에 넘어갔다는 내력을 담아 놓았다. 읽는 이마다 느낌이 다를 테지만 제국주의 공부와 부역 사사 쓰기를 하는 내게는 아리고 쓰렸다.    


 

대체 어느 이름 모를 장소를 찾아가야 제국주의와 부역 역사에서 자유로운 내력을 볼 수 있단 말인가. 관립 한성중학교가 화동 이 자리에 세워진 1900년 박제순이 우물 돌에 제 글을 새겨 넣었는데 전후 관계, 소유권 이전 과정도 알 수 없다. 그저 그런 내력이 뒤엉키며 흘러온 역사를 생각할 때 식민지 오욕은 결결이 겹겹이 육중해진다는 진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 개인사가 포개지면 잔혹으로 번진다.   

  

나는 박정희가 제 아들을 위해 입시제도를 바꾸는 바람에 인생이 송두리째 뒤집힌 장본인 중 하나다. 여기 경기중학교가 1971년에 폐교된 원인은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가 전격 실시된 데 있다. 경기중학교 들어가 가난과 소외를 극복할 꿈에 부풀어 있던 최상위우등생은 이렇게 독재자 한 사람 사욕에 희생돼 험하디험한 인생 경사로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망연히 서서 만일 그때 경기중학교에 갔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가정은 부질없다. 다만 특권층 부역 집단이 어떻게 내 인생에 직접 개입했는지 확인함으로써 진실에 더욱 통렬히 다가갈 수 있을 따름이다.  

    

북촌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정릉으로 향했다. 정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 계비 신덕왕후를 모신 곳이다. 이성계가 신덕왕후를 총애해 본디 사대문 안 정동에 있었으나, 신덕왕후와 심하게 척을 졌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이곳으로 쫓아냈다. 능을 묘로 낮추고 석물을 가져다 청계천 다리 공사에 씀으로써 사실상 주인 없는 무덤으로 만들어버렸다. 광통교나 인근 벽돌에 그 석물들이 지금도 증거로 남아 있다. 현종 때 송시열의 주청으로 복권·봉안했다. 이런 우여곡절에 아랑곳없이 능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이방원 아닌 토건 부역 후손들이 야비하게 밀고 들어와 지금 능 숲은 숨이 막힌다.   


   

하기야 어딘들 다른 풍경이랴. 조선 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자랑하지만, 막상 그 숲은 국적 없는 토건 바다에 뜬 섬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 과거는 현재와 연속을 이루면서 자부심에 찬 풍경을 과시하지만, 중첩 식민지 허울 대한민국 과거는 현재 삶과 유리된 예능 역사 담론에 불과하다. 무슨 출입 금지 푯말이 이렇게나 많은지. 내 역사와 더불어 호흡하지 못하게 한다. 박제 고가품 취급한다.     

 

나는 1965년 서울 와 돈암동 산동네에서 10대를 보냈다. 집에서 작은 능선 하나를 넘으면 정릉 원찰인 흥천사, 다시 하나를 넘으면 정릉이다. 강원도 월정사 입구 마을에서 태어나 시생대를 살아온 내게 두 장소는 더할 나위 없이 정겨웠고, 그 풍경은 안온했다. 도시 빈민으로서 겪는 가난과 소외를 견디게 해주는 너른 품이었다. 요즘처럼 무슨 놀이기구나 먹을거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냥 재잘거리며 오가고, 숲속을 쏘다니고, 먼 듯 가까운 옛 향기를 맡는 일만으로 유소년의 시간은 탱탱해졌다. 정릉 품은 백악산 자락은 그렇게 60년 가까이 내 생애 내력과 곡절에 엮이며 함께 서사를 구성해 왔다.   

   

나는 오늘 “가장 익숙하고 안온한 경로”를 따라 걸었다. 부작위 휴식이 아니라 작정하고 ‘길 잃지 않는’ 정도에서 길 잃어도 되는 저난도 일상을 살아 낸 셈이다. 사실 회룡 계곡 사건도 나를 피곤으로 몰아넣지는 않는다. 피곤하지 않으면 주파수를 낮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지 않으려 이런 흐름에 나를 놓아둘 뿐이다. 어찌 살든 걷고 머문 장소, 그 내력에 주의하며, 내가 걷고 머문 풍경, 그 곡절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인간이며 남성이며 이성애자며 비장애인이라는 사실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한껏 실컷 생을 맡길 따름이다. 나는 완전하게 불완전하며, 불확실하게 확실한 도상에 있다. 그렇다.

작가의 이전글 나나보조 이야기 24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