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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May 29.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46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13  


         

왕에게 가는 길     


여느 일요일보다 조금 일찍 떠나 영릉(英陵)으로 향했다.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경강선 세종대왕릉역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장마 끝낸 열기가 벌써 숨을 턱턱 막아선다. 처음에는 역에서 영릉까지 걸어가려 했으나 무리라고 판단하여 버스를 타기로 했다. 2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역에는 아무런 다른 편의 시설이 없었다. 시간표에 적혀 있는 시각보다 한참이나 늦게 도착한 버스가 짜증보다 반가움을 불러내는 까닭은 폭서 때문이다. 버스 기사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으나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 또한 무심하게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사방이 토건 판이라 어수선하고 너저분하다. 이미 지어진 건물, 닦여진 도로는 생경한 풍경을 함부로 드러낸다. 아직 덜됐거나 용도가 분명하지 않은 공간은 일부러 버린 듯한 살풍경을 대놓고 드러낸다. 그윽하고 아늑한 시간을 품은 공간은 없다. 역 이름도 세종대왕, 면 이름도 세종대왕, 거리 거리마다 온통 세종대왕을 떠받들고 있지만, 도무지 500여 년 역사가 지닌 묵직한 묵은 향기를 맡을 수가 없다. 식민지 장소성은 지방 도시에서도 가차 없이 본성을 과시한다.  


 능 바깥은 물론 능 안 풍경은 새로 조성한 티가 역력하다. 긴 시간을 두고 바른 고증을 거쳐 공들여 재정비했다고 하는데 때늦고 어설픈 감이 없지 않다. 이 또한 식민지 풍경 가운데 하나다. 식민지 출신 특권층 부역 집단이 통치하면서 얼마나 제 역사를 허투루 대해왔는지 풍경은 가감 없이 알려준다. 제국 정서를 그득 품은 유럽 풍경과 비교하면 대뜸 알아차릴 수 있다. 특권층 부역 집단을 보수나 우파로 표현하는 일은 잘못이다. 제 역사를 우습게 여기는 보수나 우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깔끔하나 가벼워 보이는 단장을 마주할수록 가슴이 아려 온다.    


<하늘에서 본 영릉> 사진:문화재청

   

완만히 오른쪽으로 돌아 금천이 합류하는 지점을 지나면 홍살문이 우뚝 서 있다. 거기서 곧게 펼쳐지는 향로(香路), 어로(御路) 너머로, 좌우에 펼쳐지는 풍경이 수려하다. 최고 임금을 모신 최고 명당임을 실팍하게 느낀다. 일설에 따르면 영릉 덕택으로 조선이 백 년 이상을 더 견뎠다고 한다. 이런 말을 비과학적이라고 일축할 수는 없다. 풍경은 서사로 존재한다. 풍경이 제 말을 하고 풍경이 인간 말을 듣는다. 한 왕조가 500년을 지속한 경우는 우리나라 말고 어디에도 없다. 그 힘이 어디에서 발원했다고 하건, 거기에는 우리 공동체 고유 서사가 간직돼 있다.     

 

그 서사가 공동체를 구성하며 보전하며 창발한다. 서사는 언어로 갈무리된다. 그 언어를 구성하는 글자를 창제한 세종대왕 얼이 깃든 영릉이야말로 내가 최근 연속적으로 행해온 제의를 상징적으로 마무리할 적소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극진히 합장하고 “정음” 창제에 대한 감사 예를 올렸다. 제국과 특권층 부역 집단, 그리고 그중에서도 최고헌법기관을 사유화한 인간에 대한 여덟 자 참소리 ‘축원’을 올렸다. 작은 돌 여덟 개를 거둬 지성소를 세웠다. 아무쪼록, 부디, 꼭.


<가장 가까이서 본 영릉>


천천히 숲 따라 난 길을 걸어 능을 나온다. 세종대왕릉역 화장실 벽에 걸린 액자가 문득 떠오른다. 여성 노비가 출산을 앞두면 30일 동안 노역에서 제외하고, 출산하면 100일 동안 출산 휴가를 주며, 그 남편에게도 30일 동안 휴가를 주도록, 세계보건기구가 출산 휴가 개념을 만들기 500년 전에 세종대왕이 제도화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그 민본주의가 현대 민주주의와는 다르다고 떠들지만, 그 잘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세종대왕은 왕 이전에 “팡이실이”다. “팡이실이”는 특권층 부역자의 반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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