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숙의의학 소설-

by 강용원


다시 그와 같은 숙의 상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ㅂㄱ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큰 종교단체 소속인 중견 지도자였다. 혹 있을 수 있는 실덕을 막으려 신분을 감추고 나를 찾아왔다. 얼핏 보면 당차게 느껴지지만, 그 눈에는 불안이 강고한 구조로 자리하고 있었다.



내 불안 내력은 길고 깊다. 어린 시절, 오지 않는 어머니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길을 잃고 홀로 거리를 헤맨 적도 많았다. 사춘기 시절 맞닥뜨린 우발적 성 경험이 일으킨 수치심과 죄책감은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다.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고 완화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반면, 사회생활을 통한 접촉 기회가 많아질수록 대인공포는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온갖 치료가 무용했다. 나는 결국 종교에 귀의했다. 마지막 희망도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어찌 치료를 포기할 수 있겠는가.


ㅂㅇ는 내 종교에 예를 갖추면서 폭넓은 숙의를 이어 나아갔다. 종교 경전이나 큰 스승 가르침이 동원되었고 그에 상응하는 의학적 담론이 오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무릎을 쳤다. 그의 입을 나와 내 귀에 날아든 ‘정서적 지지’라는 평범한 말 한마디가 가슴속 은산철벽에 쩡 하고 금을 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게 익숙한 어휘와 담론은 대부분 ‘이성적 이해’였으니 말이다.


정서적 지지를 내부 속으로 들여놓는 일이 기적처럼 일어나지는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반대하고 내쫓으려고만 했던 어둠의 정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는 일이 어찌 쉽겠나. 단박에 깨뜨린다는 마법적 희망까지 내려놓아야 비로소 동 터오듯 치료 길이 열리기 마련이다. 나는 이 이치를 따르고자 하는 종자 신뢰를 기다림 속에서 얻으리라.



삼베 바지에서 방귀 빠지듯 ㅂㄱ의 발길이 사라졌다. 나는 그런 그 선택을 존중했다. 제법 세월이 흐르는 동안 드물지 않게 그 간절했던 눈길이 떠오르곤 했다. 아직도 그가 그 종교에 헌신하고 있는가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만약 그가 지금 자유 영혼이 되어 있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그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정서를 지지하면서 고요히 살아가지 않을까 짐작해보기만 한다. _()_ 나무관세음보혜사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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