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역에서 열차를 기다린다. 고주파 찰 신라어를 구사하는 내 또래 사내가 화차 삶아 먹은 소리로 비슷한 또래 아낙들에게 떠든다: 아, 두 다리 멀쩡한데 말라꼬 경로석에 쭈그리고 앉을끼고. 내는 거 안 앉는데이. 아낙들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버전만 바꾸어 같은 자랑질을 되풀이하자, 좀 젊어 보이는 아낙 하나가 묻는다: 그럼, 어르신 카드도 안 쓰세요?
갑자기 주위가 찬물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모두 다 답을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물론 그 답이 그 사내한테서 나오지 않으리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는 표정도 포함된다. 마침 그때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열차가 들어온다. 사람들은 서둘러 열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그 사내 모습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나는 빈 경로석, 아니 정확히는 노약자 보호석에 앉는다.
지하철 이용하는 노인들 대부분이 저지르는 잘못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각 칸 끄트머리에 세 좌석씩 마련해 둔 보호석은 경로석이 아니다. 노약자, 그러니까 노인만이 아니라 어린아이, 영유아를 안은 엄마, 아픈 사람, 임산부···들을 포함한 교통 약자 모두에게 제공하는 공간이다. 의도적 무지를 장착한 일부 노인이 그 자리 앉아 나이 쌈질을 벌이곤 한다. 정말 ‘노·답’이다.
둘째, 노약자 보호석이 비어 있음에도 구태여 일반 좌석에 앉는 노인이 드물지 않다. 아니 많다. 정말 많다. 노약자 보호석을 만든 사회적 합의가 어떤 약속을 포함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은 자들이 그 짓을 한다. 자신이 차지한 그 자리에 앉지 못한, 그러니까 빼앗긴 젊은이가 ‘경로석’에 앉는 일은 용납하지 않을 게 뻔하면서 말이다. 이 자들에겐 우대도 보호도 무의미하다.
이야기를 다시 앞으로 돌린다. ‘경로석’에는 앉지 않는다면서 어르신 카드는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것으로 보이는) 그 사내는 정말 건강한 다리는 지녔으나 보호받지 않아도 살 정도 돈은 없어서 어르신 카드를 쓰고 있을까? 아니라면 둘 사이 모순은 왜 발생했을까? 복잡하게 따질 필요도 없다. 돈 문제만큼은 양보나 포기가 불가하기 때문이다. ‘경로석’을 둘러싼 이 이야기들은 다른 갈래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다. “늙은이” 아닌 노인 드문 우리 사회를 드러내는 서글픈 표지다.
노인 공경은 한 공동체가 스스로 세운 권위를 장로에게 헌정하는 윤리다. 그러니까 노인 공경은 한 사회가 공동체성을 유지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처럼 공동체성이 무너진 집단에는 당치않은 허례다. 김종인이나 윤여준, 또는 김형석 따위 특권층 부역자들이 원로로 소비되며, 노탐이 성공과 전형으로 칭송되는 판에 무슨. 물론 나 또한 “늙은이”다.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