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출근길, 언덕진 골목을 내려오는데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난다. 걸음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조금 걸어 옆으로 비켜주는 순간 경적이 울린다. 나는 돌아선다. 차를 가로막고 선다. 운전자가 화난 표정으로 창문을 연다. 내가 묻는다:왜 경적을 울립니까? 그가 답한다: 차가 오면 빨리 비켜야 할 게 아닙니까? 내가 다시 묻는다: 이런 골목길에서 차가 오면 사람이 비켜야 합니까? 그가 다시 답한다: 당연하죠. 내가 못 박는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흉기가 될 수도 있는 차가 사람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따라오는 게 옳습니다.
하마터면 싸움 날 뻔했으나 옆자리에 앉은 여성-배우자로 보이는-이 얼른 사과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차는 쌩하고 떠나고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검푸른 새벽하늘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사실 이럴 때마다 내가 혹시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닐까, “검열”하게 된다. 이런 경험은 한두 번이 아니고 수십 년 동안 바뀌지 않는 풍조라면 내가 유난 떤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일일이 대응하는 일도 이젠 넌덜머리가 나지만 그럴수록 모욕당한다는 느낌은 강해진다.
생겨날 때부터 그랬겠지만, 자동차는 그 자체는 물론 소유자, 심지어 운전자까지 “귀한” 대접을 해줘야 마땅한 선진 문물로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했다. 자가용차는 부와 성공, 결국 계급을 의미했다. 재물을 떠나 이동 수단 개념으로까지 나아간 요즘이지만 이 통념은 오히려 강고해지고 있다. 무슨 차를 가졌는가로 신분을 알아본다. 당연하다. 대형 고급 승용차 “모는” 사람이 경차 “끄는” 사람 무시한다. 당연하다. 심지어 오늘처럼 보행자보다 자동차, 정확히는 그 소유자나 운전자를 우선시한다. 당연하다. 왜 갈수록 당연해질까?
<가난이 병기다>에서 언급한 제국주의 생활 양식 3대 아이콘이 자가용차, 자기 집, 육식이다. 이것들은 정착형 식민 과정을 환기하는 상징이다: 정복 전쟁과 자동차, 점령·소유와 자기 집, 제노사이드와 육식. 제국주의를 완성해 가는 역사를 따라 이 아이콘은 제국 경계 넘어 식민지까지 물들이며 탐욕 극대화에 주구로 복무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짝퉁이나 싸구려 떡고물이 식민지 무지렁이 부역자들에게까지 떨어뜨려짐으로써 적극·능동 부역 체제가 난공불락 지경으로 치달아 가고 있다.
자가용차는 제국 용병이 거침없이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진군 이미지를 화려하고 경쾌하게 만들어내어 가부장 오르가슴을 만족시킨다. 일방 독단으로 조작하고 조종하는 소유·운전자는 제국 통치자 심리를 그대로 복사할 수 있다. 운전대를 잡는 순간부터 제국 아바타가 되어 역사도 문화도 없는 “인류”를 살육하도록 천명 부여받은 성스러운 전사가 되니, 누군들 골목길 아니라 주차장에서라도 경적을 울려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가용차가 어떻게 제국 성막이며 군대며 병기가 아닐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아가는 식민지 백성 사정을 나도 무지렁이 부역자인 한 한사코 외면할 수만은 없다. 이해도 공감도 십분 넘친다. 그러나 알고는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중첩 식민지를 살아가며 어떤 모순에 침윤되어 있는지를, 알아도 사무치게 알아야 한다. 일제 마지막 총독 아베가 축원한 바를 완수하려 뉴라이트 바지 사장 앞세워 대통‘년’이 날뛰고 있는 오늘 내 정치적 상상력은 이렇게 애먼 새벽 운전자에게까지 신랄하게 꽂힌다. 40일도 채 남지 않은 내 60대를 모멸로 채우고 싶지 않다. 어찌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