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82
사골 육수와 해바라기
줄줄거리는 콧물 빼곤 다른 증상이 전혀 없어 안심이긴 하지만 늙어가는 몸에 예를 갖추려고 연한 소금물로 콧속을 헹군다. 방 습도를 조절하기 위해 물을 떠 놓고 가볍게 방바닥에 물을 뿌려준다. 일요일 새벽 눈을 뜨니 코 증상은 거의 없는데 몸이 살짝 무겁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전갈이다. 다른 때 같으면 이미 집을 나섰을 시각 2시간 남짓 지난 뒤 따뜻이 차려입고 집을 나선다. 걷는 거리를 줄이기 위해 일정을 맞춘 결과다.
나는 본디 감기나 독감에 걸리면 단식으로 대응한다. 물론 참으로 감기 치료하는 양약은 존재하지 않거니와 먹어본 적이 없다. 스스로 지은 한약도 실은 거의 먹지 않는다. 내 몸이 한약조차도(!) 잘 받지 않아서다. 이번에는 태도를 싹 바꾼다. 우선 사골 육수로 만든 따뜻한 음식을 먹기로 한다. 비건도 채식주의자도 아니지만 육식을 거의 전혀 하지 않는 내게는 아주 특별한 선택이다. 이 특별한 선택에는 특별한 인연이 작용한다.
우울에 집중하느라 비교 열위에 놓였던 불안을 곱게 탐색하다 발견한 책 『내 몸이 불안을 말한다』에서 엘런 보라는 사골 육수가 지닌 가치를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류 거의 모든 전통문화에 각기 고유한 형태로 보존된 사골 육수는 장(腸)을 치료하고, 중요 건강 지표를 유지해 준다. 이런 따뜻한 말을 컬럼비아 의학대학원 출신 양의사에게 전해 들은 나는 부끄러움에 빠져들고야 만다. 그동안 사골 육수를 서늘한 눈매로 봐와서다.
육십 년 전 살던 삼선동 어느 노포를 일부러 찾아가 평소 잘 먹지 않던 사골 육수 든 음식을 먹는다. 맘이 달라지니 맛도 다르게 느껴진다. 속이 따뜻해지자 나는 햇볕 바라며 성북천을 걷는다. 성북천은 청계천 지천으로 백악산에서 발원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물이 맑아 좋은 빨래터, 놀이터였다. 오염되자 상류 대부분을 덮었다가 다시 열어 오늘에 이른다. 수수한 풍경을 지닌 작은 시내로 오늘 내 몸 상태에서는 꼭 똑 좋다.
일요일 ‘공식 행사’인 장보기와 가족 식사를 위해 이동한다. 10km 이내 걷기를 계획하고 시간 맞추어 미도산으로 향한다. 아주 익숙한 산에서 오늘은 낯선 행동을 한다. 스트로브 잣나무 꼬마 숲으로 들어가 가장 따뜻한 곳에 서서 한참이나 햇볕을 쬔다. 나직나직 콧노래를 부른다. 한 바퀴 돌아 마무리 짓기 전에 나무 의자에 앉아 다시 햇볕을 쬔다. 겨울 냉기 틈을 비집고 앙금앙금 온기가 기어든다. 이런 휴식이야말로 오달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