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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보조 이야기321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by 강용원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88


기어이 경운궁과 경희궁까지

일요일 오전 집을 나서 숲이나 물로 향할 때 몸도 마음도 무겁기 마련이다. 나는 이 현상에 자연 결핍이라는 소극 표현 대신 도시 중독이라는 적극 표현을 쓰고 줄여서 시독(市毒)이란 이름을 붙인다. 오늘은 시독이 너무 맹렬하다. 여느 때 같으면 숲이나 물에 이르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시독이 풀리는 느낌을 확연히 받는데 오늘은 한 시간 남짓 걸어도 요지부동이다. 표정이 전혀 풀리지 않는다. 나는 견디다 못해 급히 관악산 줄기 까치 갈래 숲을 벗어나 인헌 전통시장으로 들어간다. 뜨끈한 국물 음식과 소주를 주문한다. 우선 찬 소주부터 연거푸 석 잔 들이켠다. 곧이어 밥 한술 국물에 적셔 꾹꾹 씹어먹는다.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몸과 마음이 거짓말처럼 풀린다. 아, 여기가 바로 시중소산(市中小山)이렷다.

때아니게 소낙눈 보라 치는 거리로 나와 나는 숲을 등지고 걷기 시작한다. 그래, 인간사 한가운데서 받은 열을 오늘은 인간사 한가운데서 식혀 본다. 아니, 아니다. 오늘“은”이 아니구나. 기어이 오늘“까지”가 맞다. 팡이실이 각성은 이렇다: 오늘 겪는 위기를 가로지르려면 역사를 거슬러 곤경을 숙고하라. 사직단에 이어 오늘까지 경운궁과 경희궁을 걸어 시대 통오(痛悟)를 완성하라. 나는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에서 내려 덕수궁으로 간다. 덕수궁은 본디 이름이 경운궁이다. 일제와 이완용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며 붙인 이름이다. ‘덕수(德壽)’는 퇴위 임금 궁에 붙이는 보통명사로 임금이 죽으면 사라져야 한다. 이 이름을 여전히 남겨두는 일은 대한제국 황궁이기도 했던 역사를 가리는 식민지 유제로밖에 볼 수 없다. 경운궁 오욕은 이름만이 아니다.

이름에서 출발해 일제는 경운궁을 온갖 야비한 방식으로 더럽혔다. 중요 전각을 때려 부수고 팔아먹었다. 궁 위엄을 없애고 희화하려 공원을 조성했다. 해방 이후로도 경운궁 훼손은 계속되었다. 1960년대 돌담을 헐고 창살 담으로 개조했다. 1970년대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대한문을 태평로 한가운데 고립시켜 모욕을 가했다. 나중에는 뒤로 물려 오늘날 위치에 가져다 놓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경운궁 권역은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말았다. 1980년대부터 복원하면서 제법 많은 전각과 시설이 옛 모습을 되찾았으나 현재 권역 두 배 이상이 매각된 상태라 완전한 복원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놈 제국과 그 부역 국가 허울 대한민국이 우리 역사를 어떻게 파괴하고 조롱했는지 뜬금없는 프랑스식 공원 앞에서 해맑게 사진 찍는 관람객은 알고나 있나.



역사 속 경운궁 오욕과 현실 속 내 오욕은 알게 모르게 진실을 공유하며 다음 행로도 함께 한다. 정동길을 따라가다 6번 국도를 건너면 흥화문을 만난다. 흥화문은 경희궁 정문이다. 흥화문은 경운궁 대한문보다 훨씬 더 잔혹하게 끌려다녔다. 일제가 자리를 옮기고 팔아먹은 다음 계속해서 팔려 다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나마 돌아왔으나 본디 자리도 본디 방향도 아니다. 흥화문 역사만으로도 경희궁이 어떤 굴욕을 당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광해군이 경덕궁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거대한 궁궐이었으나 경복궁 재건을 위해 전각 90% 이상이 뜯겨 나갔다. 일제는 말할 나위조차 없고 해방 이후 서울시가 훼손을 계속 자행해 오늘날 남은 권역은 본디 권역 2%에 지나지 않는다. 5대 궁궐과 종묘, 사직 가운데 가장 참혹하게 모멸당한 궁궐이다.

1985년 전두환 정권 때 12대 총선을 앞두고 민심 수습 차원에서 경희궁 터 공원 조성 계획을 세웠다. 2002년까지 중요 전각을 복원해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그 후 오랫동안 거의 방치 상태에 있었는데 2024년 서울시가 서울특별시교육청, 서울역사박물관, 기상청과 같은 건물들을 이전하고 경희궁 터 중심으로 2035년까지 서울광장보다 10배 큰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세부 내용을 접하지 못해 정확하지는 않으나 고증을 통해 궁궐 전각이나 다른 시설을 복원한다는 내용은 찾을 수 없다. 내 눈에 이 계획은 역사에 관심 없어 보인다. 경희궁과 돈의문이 있으니 그냥 그렇게 이름 붙인 토건일 뿐이다. 일제가 우리 궁궐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면 그들과 똑같이 궁터에 공원을 조성할 수는 없다. 찐 후손은 공원 아닌 궁을 걷고 싶다.

경희궁을 끝으로 종묘-창경궁-창덕궁-경복궁-사직단-경운궁-경희궁 순례를 마무리한다. 물론 이 순례를 처음부터 기획하지는 않았다. 찰나마다 팡이실이 음성을 들으며 초군초군 제의로 만들어갔다. 다음에는 경운궁-경희궁-사직단-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 또는 반대로 종주해 볼 생각이다. 너무 미미한 복원 탓에 볼거리가 적어 5궁 가운데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 씁쓸한 현실을 다시 곱씹는다. 떠나기 전, 가장 참혹하게 짓밟힌 역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 경희궁에서 단군 이래 가장 참람한 매국 수괴와 그 일당이 저지른 쿠데타를 단죄하는 작디작은 제례를 올린다. 준비해 간 정화수를 여덟 번 따르고 삼배를 올리면서 간절히 빈다: 경희궁을 도륙한 왜놈 제국에 나라를 되팔려고 쿠데타 일으킨 수괴 부부와 일당을 일망타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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