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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일보 May 19. 2024

영웅은 초년에 고생했다

김길웅, 칼럼니스트



7080 어른들은 산업화 이전에 초등학교를 다녔다.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초년고생을 겪은 세대다. 그때의 고생을 곧잘 함축한다. “초근목피를 먹었다.”




오뉴월이면 찔레의 새순을 먹고, 고픈 배를 속이려고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삘기를 뽑았다. 남의 고구마밭에 들어가 몇 뿌리 파먹어도 ‘서리’라고 용서하던 시대의 관용이 있었다. 




고무신을 신었지 운동화는 구경도 못했다. 보자기에 책을 싸서 들거나 허리춤에 묶고 다녔다. 아, 생각난다. 한 학년 올라갈 때엔, 어머니가 동네를 돌다 이웃 마을에까지 가 헌 교과서를 구해 오던, 그 가난의 숨결은 얼마나 가팔랐나. 어머니가 손수 뜬 무명옷엔 있어야 할 호주머니가 빠져 있기도 했고, 머리를 깎는다고 동네 어른에게 가면, 그때 말로 ‘바리깡’에 머리 물려 눈물 한 사발을 받고 앉던 소년의 그 서러운 서사….




60년대를 지나며 근근이 밥을 먹게 되더니, 초가집이 슬레이트로, 슬래브 양옥으로 바뀌었다. 요즘은 시골에도 차 없는 집이 없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어쩌다 나도 초년고생 했노라 하고 있다. 실은 시대의 물결을 탄 것이지, 혼자 고생했노라고 울먹이며 옛날을 회상할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동정심에서일까. 초년고생을 겪었는지, 어려운 사람 얘기엔 울컥하고, 웬만한 고생엔 또 어지간히 모질다. ‘초년고생은 양식 지고 다니며 한다.’ 한 말을 되뇐다. 




별스레 비가 잦은 봄 날씨 탓일까. TV 앞에 앉았다 줄줄이 이어지는 광고에 질려 컴퓨터로 분위기를 바꿨다. 총선 뒤 여야의 대치 정국 속에 인터넷 기삿거리가 그만그만이라 물리려는데, 스며든 한 가닥 빛에 눈이 머무른다. 




‘임영웅이 우리 집에 참외를 갖다줌’이라는 제목의 기사다. 임영웅이 참외라니? 머리를 굴려보아도 될 법한 조합이 아니다. 몇 줄 읽자니 분명해졌다. 임영웅이 상암에서 열리는 콘서트 준비를 하면서, 연습 시 주변 이웃에게 소음을 일으켜 죄송하다고 참외로 사례했다는 것. “영웅인 미치겠다.”로까지 파급되고 있다. 글쓴이는 요즘 시끄럽게 해 죄송하다며, 철인데도 금값인 과일을 돌리는 사람은 처음이라 덧붙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는 남에게 폐가 되면 어쩌지 하면서도, 생각지 못하거나 하더라도 지나치는 경우가 흔하다. 그걸 실제 행하는 것, 작은 미담의 실천은 힘든데 영웅은 다르다. 사소한 것에도 꼼꼼하고 정교하니, 그 진정성이 놀랍다. 언제나 배려하는 마음을 담는다. 




연예인 대부분 뜨기 전 무명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임영웅은 편모슬하에서 고생하며 자라 이웃을 돕는 데도 앞장서, 꾸준히 기부를 이어온단다. 경북‧강원 산불 이재민을 도왔고, 지난 어버이날 쾌척한 성금 2억원 등 9억원에 이른다. 참외를 돌린 게 대수가 아니다. 영웅은 마음을 헤아린다. 그게 소중하다. 91년생이 노인 같잖은가. 배려하는 마음, 남의 입장을 내 처지로 바꿔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은 얼마나 값진가. 




뭇 사람들을 사로잡는 임영웅, 그 노래의 감동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착한 심성과 고운 마음자리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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