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민숙, 세화중학교 교감·수필가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에 있는 ‘바오름’은 ‘식산봉’이라고도 불린다. 봉우리에 짚을 덮어 군인의 식량처럼 보이도록 함으로써 왜구의 침입을 사전에 차단했다 한다. 어려서부터 들어오던 오름 내력이다.
숲이 우거진 산책로를 걷다 보니 동무들과 숨바꼭질하며 몸을 숨겼던 바위들은 여전하다. 시야가 탁 트이는 정상에 올랐다. 찜찜하게 고여 있던 일상의 앙금 따위는 어느 지점에선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바오름에서 바라보는 일출봉은 또 다른 감회다. 어릴 적 오누이 같달까. 수려하고 웅장한 일출봉은 자신감 넘치는 오라버니뻘쯤이고, 바오름은 오라비를 위해 묵묵히 헌신했던 손아래 누이처럼 보였다.
눈 아래로 갯가가 펼쳐졌다. 바닷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는다. 마치 오름의 주인인 양 찬찬히 훑어보다가 낯선 사람에 대한 스캔을 마친 듯 파드닥, 날개를 펼치며 비행한다. 새의 날갯짓 덕에 나도 파드닥, 고요를 밟고 일어섰다.
노란 무궁화 군락지로 향했다. 이십 년을 이곳에 살았어도 있는 줄 몰랐는데 최근에 알게 된 황근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식지라는데 나무는 20여 그루 남짓하다. 황근은 대기오염에 취약할뿐더러 아침에 꽃을 피워 저녁에 지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없어 더욱 귀히 여겨진다. 노란 꽃잎이 눈에 밟혀 기르고 싶지만, 청정한 환경을 제공할 자신이 없다.
눈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홀리는 황근의 자태는 오늘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보지 못한 사람은 많아도, 한 번 보고 마는 이는 없을 것 같다. 하루가 저물 즈음엔 꽃이 고개를 떨구겠지만, 이미 제 몫을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로 유명해진 오조 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드라마에 ‘럭키 슈퍼’로 나왔던 돌담집이 옛 모습 그대로 앉아 있다. 해녀가 물에 들어 성게나 소라를 잡은 후 손질하던 곳이다. 잠수복을 갈아입기도 하고, 해초를 보관하기도 했었는데 연출 덕인지 화면에서는 딴 곳처럼 보였다.
포구와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를 건너 사시사철 맑은 용천수가 흘러나오는 ‘족지물’로 향했다. 수도가 흔치 않던 사오십 년 전엔 누구랄 것 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김장용 배추를 씻기 위해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 먹거리는 윗물에서 씻고, 아랫물에서는 서답막개(빨랫방망이)를 어지간히 두드려 대곤 했다.
여름철엔 마을 목욕탕이었다. 오죽하면 남탕, 여탕이 따로 있었을까. 얼음처럼 시원한 물속에서 입술이 새파래질 때까지 물장구를 치며, 더위뿐만 아니라 누추한 가난까지 말끔히 날려 보냈다. 그래서인가. 족지물은 아직도 내겐 영감(靈感)인 듯 간밤에 꿈을 꾸면 끝내는 반가운 소식을 듣곤 한다.
마을 어귀에 오조리 지명의 푯말이 보인다. ‘오조(吾照)’를 풀이하면 ‘나를 비춘다’는 뜻이다. 일출봉에 봉곳이 솟은 해의 눈길이 처음 가닿는 마을이기 때문 아닐까.
오랜만의 고향 나들이가 선물 같다. ‘해가 비추는 곳’에서 ‘나를 비춰보는 시간’은 황혼을 앞둔 내겐 꽤 풍성한 추석 선물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