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조, 제주숲치유연구센터대표·산림치유지도사/논설위원
초록이 돌아왔다. 따스한 봄기운 타고 초록이 넘실거린다. 여기저기 초록 세상이다. 수풀 속에서도, 들판에서도, 밭에서도, 오름에서도, 나뭇가지 끝에서도 초록은 힘찬 고동을 울리며 솟아오른다. 모두 일어나 물들인다. 초록 향연이 펼쳐진다.
새봄이 오기 전 초록은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땅의 갈색 속에서 숨죽여 있었다. 그때는 갈색 세상이었다. 갈색이 대지를 지배했다. 들판에 듬성듬성 뭉쳐진 수풀들이 그렇다. 지난날 누렸던 영화의 흔적이다. 얽히고설키고 엉클어진 채로 어수선하게 놓여 있었다.
드러난 색깔마저 어둡다. 거무죽죽하다. 축 늘어져 무기력하다. 바람과 비와 햇빛으로 색깔은 더욱 퇴색해간다. 조금씩 부서져 흩어진다. 땅의 색으로 녹아든다. 이렇듯 갈색은 누런색에서 어두운 갈색, 그리고 마침내 흙색으로 돌아가 자취를 감춘다.
들판에는 덤불이 있다. 갈색 수풀이다. 그 속에는 햇볕도 잘 들지 않는다. 누구도 그곳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조용하고 포근하다. 차가운 바람도 오다가 돌아선다. 마치 모태와 같다. 그런 갈색 속에서 초록 씨앗은 꿈을 꾼다. 갈색 이불 삼아 숨을 고르며 따뜻함이 오기를 기다린다. 드디어 햇볕의 맛을 본다. 연하고 연한 초록이 조용히 고개를 내민다. 기적 같은 일, 초록의 탄생이다.
초록 탄생은 생명체의 생장이다. 새로운 세포들이 뭉쳐진 결합체다. 모든 것을 내주는 갈색의 공간에서 여리고 여린 연두색부터 출발한다. 마치 아기의 살결처럼 부드럽다. 그리고 점차 자신이 태어난 갈색의 공간을 지워나간다. 끝내는 갈색을 삼키며 초록 세상을 만든다.
보리밭은 이미 초록으로 물들었다. 진한 초록 세상이다. 겨우내 우세했던 갈색 영역은 찾아볼 수 없다. 듬성듬성 힘겨웠던 초록의 시간도 있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초록으로 넘친다. 짙은 초록으로 갈아탄 지 오래다.
나뭇가지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가지 끝에 움츠렸던 자주색 껍질이 열리며 초록이 얼굴을 내민다. 손바닥처럼 펼친다. 갓 태어날 때는 작은 바람에 금방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단단하게 붙어 있는 힘이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때만 잠시 움츠릴 뿐이다. 햇볕이 오는 날 다시 일어났다. 그렇게 초록은 자신을 하나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세 개로 분화하며 생장한다.
초록이 오는 날에는 새들이 부르는 노래마저 다르다. 아침마다 찾아와 주거니 받거니 번갈아 가며 재잘재잘 지저귀는 소리가 경쾌하다. 맑고 청아하다. 들판을 뛰어다니던 노루도 신났다.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연하고 부드러운 초록을 용케 찾아내 한입 삼킨다. 초록 향기에 흠뻑 취한 아주머니도 바구니를 들고 들판의 초록 앞으로 다가간다. 햇볕을 먹으며 생장하는 초록을 반긴다. 초록을 캐며 콧노래까지 한다.
이렇듯 초록은 우리에게 익숙한 색이다. 유구한 역사를 숲에서 살아왔기에 더욱 그렇다. 초록을 보면 생기가 돌고 활력을 되찾는다. 마음은 편안하고 여유롭다. 울창한 숲에서 심신의 안정을 가져오는 것은 초록의 힘이다. 행복감과 편안함을 선사한다.
역동하는 봄의 중심에서 초록 생명의 울림은 창대하다. 다가올 세계, 짙푸른 초록으로 열어가는 환희의 빛이다. 그 빛 속에는 서로 돕는 상호부조의 힘이 있다. 그렇기에 평화로운 숲의 공동체가 조성된다. 나도 어느새 공동체에 합류해 초록 향연에 취한다. 초록과 말을 한다. 초록치유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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